살아있다는 실감이 없는듯한 기묘한 체감과 함께, 뿌연 안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듯한 공허함 속을 헤메다가 눈을 떴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묘한 피로감으로 멍한 상태에서, 막연하게나마 제발 그것만은 아니기를 바랬지만 두 눈 앞에는 언제나처럼 숨막힐듯한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다급하게 팔에 힘을 줘서 눈 앞의 어둠을 밀어내자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칠흑같은 어둠이 가셨다.


그렇지만 처음보다 조금 밝아졌을 뿐, 여전히 주변에는 숨막힐듯한 어둠의 장막이 깔려 있었다.


두려움에 가득 차서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어나서부터 쭉 살아왔던 우리 가문의 대리석으로 된 웅장한 저택, 그 안쪽에 있는 나의 방, 그러니까 자매들의 방이었다.


단지 삶에 있어서 조금의 먹구름도 없었던 시절과 달라진 점이라면, 주변의 모든 것이 밤의 어둠 아래 놓여있어서 언제나 눈을 부시게 했던 하얗고 아름다웠던 대리석 벽이 찬란한 광채를 잃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나마 미약하게나마 창 밖에서 달빛이 드리우고 있는 덕에 완전한 암흑만은 면했을 뿐.


최근 매일 잠에서 깨면 마주하는 이 어둠이, 나는 너무나도 답답하고 진절머리나서 눈물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그때, 달빛을 등지고 있던 창문이 있는 쪽, 방 구석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검고 섬뜩한 인영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섬뜩한 존재감에 언제나처럼 반사적으로 놀라 흠칫 하고 굳어있는 사이, 검은 로브를 쓰고 있던 섬뜩한 존재는 검지를 흔들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안 되지, 안 돼."



뼈마디나 다를게 없는 시체처럼 비쩍 마른 서늘한 손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나는 나무로 된 상자 안에 있었고, 그래서 끝내 그 섬뜩하고 차가운 손길이 내게 닿는것을 막지 못했다.


주변에 널린 물건과 조금도 다를바 없이 서늘하고 생기없는 손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잘때는 꼭 관의 뚜껑을 덮고 자라고 했지? 그렇지?


답답한건 이해한다만 너희 자매의 몸은 아직 미완성이니 사소한 것 하나도 조심해야지 않겠느냐?


너희는 아비와는 다르게 우수한 자질을 지니고 있으니 정말 걸고 있는 기대가 크구나.


그러니 그때까지 몸 간수 잘 하거라. 


괜한 짓을 했다가 모처럼 찾은 그 귀한 몸뚱이가 쓸모없게 되면……겔겔겔."



상대는 내 머리를 사랑스럽다는듯이 부드럽게, 그렇지만 소름돋게 징글맞은 손길로 쓰다듬으며, 두건으로 덮인 어둠 아래로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웃어댔다.


더 이상 견딜수 없게 된 나는 그 손길을 홱 하고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둘째 동생의 관으로 뛰어가 몸을 기대고 벌벌 떨었다.


검은 예복을 전신에 두른 섬뜩한 존재, 


명망높았으나 수명에 대한 헛된 욕망으로 영락해버린 우리 가문의 지배자이자,


또 우리와 같이 꼬드김에 넘어가 스스로 노예가 된 처지의 수 많은 다른 '동족'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 모든 사악한 음모의 근원이자, 이토록 악독한 주술을 만들어낸 '어둠의 주인'.


그는 내 무례하고 적대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화 난 기색 없이 불길한 웃음을 흘리며 섬뜩한 눈길로 내 전신을 훑어대고 있었다.



"이런, 이런……. 


뭐가 그리도 싫은 건지는 몰라도, 뭐, 좋다. 


예상대로 별 문제는 없구나.


전에도 말했지만, 오늘 밤까지는 이전에 투여했던 시약의 경과를 관찰해야 하니 별다른걸 시키지는 않겠다만, 


괜히 방 밖으로 나가서 모처럼 너희를 위해 만들어둔 결계를 망가트리지 말거라.


필요한게 있다면 하인을 부르고, 문제가 생겼을땐 하인을 불러 내게 연락하고.


알겠느냐?"



나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면서 증오와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눈빛으로 주인을 노려보았지만,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던 주인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지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야지. 우후후후……."



둘째가 한시라도 빨리 잠에서 깨길 바라며 그 아이의 관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자, 어둠의 주인의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점점 방에서 멀어져 이내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묻은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관에서 칭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나는 재빨리 둘째의 관 뚜껑을 들어올렸다.


둘째는 잠이 덜깬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울상을 짓고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고, 곧 울음을 터트리면서 내 품에 안겼다.


분명 나 만큼은 아닌것 같지만(부끄럽게도), 이 아이 또한 매일같이 마주해야 할, 자리에 누워도 끝나지 않는 밤의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여명이 밝아올 때가 되면 그것을 피해 차갑고, 어둡고, 비좁은 관 안으로 몸을 뉘여야 하는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나야 그래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아래의 삶을 영유할 수 있었고, 떠올릴때마다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그 날의 기억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가엾은 혈육은 채 어른이 되기도 전에 가문의 어른들이 내린 어리석은 선택에 휘말려, 죽음을 속인 댓가로 마땅히 모든 생명이 누려야 할 태양의 따사로운 축복을 피해 차가운 밤의 어둠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나마 셋째는 너무나도 어렸던 탓에 그 어둡고 사악한 존재의 섬뜩한 손길을 유예할 수 있었다는 것 만이 위안일 뿐이었다.


당장은…….


나는 품에 안긴 채 몸을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는 둘째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오늘도 그 무서운 사람, ……왔어?"


"이젠 괜찮아. 이미 왔다 갔으니깐."


"그럼 오늘은 방에서 나가도 돼? 제발……."



둘째의 방에서 나가겠다는 말의 의미는 마당으로 나와서 동이 트는것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더라도, 내가 허락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놔둔다면 둘째는 황금처럼 빛나는 태양빛 아래에서, 그토록 바래왔던 밝은 태양 아래의 그리운 품으로 돌아가 마음의 위안을 얻는 댓가로 완전히 파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인의 당부와는 별개로, 나는 아직 이 아이를 놓아줄 수 없었다.


아직 삶에서 제대로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 이 아이가 가엾게 느껴지는 것은 제쳐두더라도, 나는 마음의 위안이 되는 누군가를 태연하게 놓아줄 수 있을만한 위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둘째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눈물이 차 있는 두 눈을 마주하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아서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연하게도 둘째는 내 대답에 다시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면서 내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


매일 눈을 뜨면 어둠 속이잖아.


나, 이런 거, 이렇게 어두운 거……. 이제 정말 싫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리 어른 때문에, 나 때문에……."



그래도 이런 몸이 되고도, 철없는 우리 자매는 처음 몇일 동안은 정말 즐겁게 지냈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책임도, 지겨운 공부도, 지긋지긋한 가정교사도 없는 인륜이 무너진 비일상에서, 매일 실컷 잤는데도 밤이라서 재밌다며, 천둥 벌거숭이처럼 사람이 없는 밤의 거리를 누비며 뛰어다녔다.


몸이 약해서 늘 누워있었던 둘째는 전에 이렇게 몸이 가벼웠던 적이 없었다며, 부정한 생명으로 일으켜진 몸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기찬 미소를 지으며 달빛 아래를 활보하고 다녔다.


신선하고 재밌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하루, 이틀, 한 주, 한 달, 일 년이 지나고 나면 신선함은 사라지고 그 것, 밤의 어둠의 본질이, 심연 속에 또아리 튼 진정한 악의가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다.


영생을 살게 해주겠다는 헛소리에, 몸이 아픈 동생을 건강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꼬드김에, 철없는 아가씨였을 뿐이었던 나는 지긋지긋한 정략결혼을 피할 좋은 핑계라고 생각해서 적극 찬동했었다.


그래서 그 이면에 또아리튼 악의가 얼마나 깊고 어두운 것인지 조금도 생각지도 않은 채, 가족 모두를 선동했었다.


그 결과, 어머님과 막내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의 삶은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그 끔찍한 존재의 손아귀에 붙들리고 말았다.


당장은 어머님과 막내가 온전한 인간인 채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이 가문이 완전히 제 것인 양 제멋대로 굴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인다면 본색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당장 이 순간에도 부작용의 치료와 몸의 조율을 명목으로 우리 자매들의 온갖 실험을 하고있지 않은가.


별다른 특별한 가치가 없다면서 주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아버님이 그저 부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거기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며, 주인의 명령에 따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도와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가 우리의 생명줄을 쥐고있기 때문에, 이제는 집안의 주인인 아버님조차도 명목상으로는 가문의 하인인 어둠의 주인 앞에서 쩔쩔맬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



둘째는 나를 끌어안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은 우리 자매가 이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이 시간이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부대끼고 있지만, 악의의 독은 우리들의 내부에도 스며들어서 조금씩 그 사이에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육체에 새 생명이 깃든 뒤로, 언젠가부터 둘째는 전에는 부리지 않던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날을 세워서, 아버님에게, 어머님에게, 막내에게, 나에게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아이 뿐만이 아니었다, 아버님도 물론이고, 나 조차도 가끔은 견디기 힘든 격한 폭력적인 충동에 휩싸여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어둠의 주인은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말했지만, 난 이제껏 살면서 내면에 이런 본성이 있다고 한 번도 여긴 적이 없었고, 하늘에 맹세코 그 부자연스러운 분노가 당연하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그것은 분명 그의 사술(邪術)이 낳은 악의의 씨앗이고, 마음을 좀먹는 질병이었다.


둘째를 끌어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치게 예민해진 전신의 감각이 방 너머, 심지어는 집 너머까지 징그러운 감각의 촉수를 뻗어 사소한 떨림까지 훑듯이 감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 어딘가에 구실이라도 있다면 금방이라도 폭력적인 본성을 해방하려는 듯이.


그래서 어느 틈에 다가와 문 너머에서 자신의 변해버린 언니들을 숨 죽인채 바라보고 있는 막내의 존재 정도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어깨의 떨림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아마 둘째도 눈치챘을것이다.


그렇지만 괴물이 되어버린 우리는 차마 그 아이를 다치게 할까봐 부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미움받을 각오는 없어서 냉혹하게 내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 아이의 존재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우리들의, 밤의 어둠속에 도사리는 괴물의 형형한 안광으로 빛나는 두 쌍의 눈이, 이제는 세상에 없을 상냥한 자매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가엾은 혈육을 겁주지 않기 위해,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흑……."



그렇지만 조숙했던 막내는 어렴풋이나마 우리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으면서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막내는 우리가 보이지 않도록 문 너머로 몸을 돌려버리고는, 울먹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는, 이 긴 밤이 지나갈때까지 매일 밤 이렇게 앉아서 숨죽이고 우는 수 밖에 없었다.


어둠의 주인은 우리 자매가 전에 없었던 커다란 힘을 손에 넣을거라고 말하고는 했지만, 당장 눈 앞에서 울고있는 혈육조차 구해주지 못할 정도로 무력한 것이 우리였다.


우리 자매는 언제까지고, 시간이 흘러 얼마나 되는 세월이 흐르더라도 이대로 주저앉아 절망하고 있을 것이었다.




둘째가 그 말을, 


마법같이 달콤한, 


독액처럼 지독한, 


그 약속을 입에 담지만 않았더라면.



"있잖아, 언니야."


"……왜 그러니?"


"언젠가 우리 같이……셋째도 같이 해서 아침 해를 보러 가자."


"그건 안된다고 했잖니. 주인님이 말하셨듯이 우리는…――"


"으으응. 그런 의미가 아니야."





어느 새 둘째의 목소리에선 더 이상 울음기가 묻어나오지 않았다.


대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나 같은 나잇값도 못하는 연약한 여자는 스스로 품지도 못할 강한 결의가 담긴 눈빛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스스로도 둘째의 결연한 모습에 깜짝 놀라서, 지금 내가 품고있는 것이 정말로 내 동생이었던, 언제나 지켜줘야 할것 같았던 연약한 아이인가 싶었다.


잠시나마 내가 모르는 괴물이, 내 동생인 척 하고, 그 아이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나를 끌어안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어 겁이 날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해서, 그 아이에 마음을 의존하고 있어서, 그 아이가 동생이 아니어서 두려운것보다, 설령 그것이 그 아이인 척 하는 괴물이더라도, 미움받는것이 더 두려웠기에 차마 그 아이를 뿌리치지도 못했다.


둘째의 작은 손이 지옥에서나 자라날, 사람을 양분으로 해서 뜯어먹는 뿌리덩굴처럼 내 몸을 단단하게 붙들어맸다.


나는 두려움에 삼켜진 채 강제로 그 아이의 결의의 찬 두 눈과 마주해야만 했다.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힘으로, 주인을 쓰러트리자."


"너……, 그, 그런 소리……! 쉬, 쉿!"



나는 누가 들을세라(이미 셋째가 듣고있긴 했지만) 황급하게 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둘째는 내가 입에 손가락을 넣든 말든, 단호하게 자신이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이고 주인이 우이 몰래 알고 이은 거 전부 알아내서, 우이의 힘으로 저우를 극복해서 당당하게 다섯이서 아침 해를 보러가자.


무은 수를 써서라도."


(그리고 주인이 우리 몰래 알고 있는 거 전부 알아내서, 우리의 힘으로 저주를 극복해서 당당하게 다섯이서 아침 해를 보러가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




내가 결의에 찬 둘째의 기세에 짓눌려 전율하는 사이, 대화를 엿듣고 있던 문 너머의 셋째 또한 둘째의 결의에 반응해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곧바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막내가 우리 얘기 듣고있었어. 괜찮을까?"


"괜찮아. 나는 걔 믿어. 걔는 우리의 편이야. 틀림없어."


"그걸 어떻게 확신하니? 나도 그렇지만, 너도 그 아이한테 난폭하게 대한 적 있잖니.


어쩌면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절대 그럴 리 없어. 그 얘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우리 자매는, 우리 가족은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테니깐."


"정말로……?"


"정말에 정말이야. 나를, 그 아이를 믿어줘."


"그, 그럼……."




너는 어떻게 그 가죽과 뼈다귀만 남은 반송장같은 노인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뿐인 겁쟁이들을, 그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단호하게 믿을 수 있었던 걸까.


나는 그 아이를 보호해줘야 할 어른임에도, 그 아이처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결연한 결심 같은것은 내리지 못했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목숨을 건 결의를 하는 동안, 그저 밤의 어둠이 두려워서 덜덜 떨면서 부화뇌동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나치게 순수하고 올곧은 그 아이가 도처에 깔려있는 악의의 덫에 걸려 스러지지 않도록,


숭고한 뜻이 악의에 찬 사욕의 짐승들의 욕심 가득한 아가리에 뜯어먹히지 않도록,


그 아이의 곁에서 내게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해 그 아이가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설령 내가 알고 있던 순수하고 여린 동생은, 이미 가슴 속에 뿌리내린 괴물에게 뜯어먹히고 가죽만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럼……있지? 만약, 만약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저기……그……언니의 옆에 서서 이 언니의 손을 잡아주지 않겠니?"


"그럴게. 약속이야."



그저 말 뿐이었다곤 해도 둘째의 결의에 찬 다짐은 마약처럼 달콤해서, 저도 모르게 비열한 독점욕을 발휘해서 그 아이에게 굴레를 메고 말았다.


순수한 그 아이를 세상 누구보다도 지켜줘야할 혈육이, 제일 먼저 부정한 욕망의 촉수를 뻗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둘째는 기쁜 얼굴로, 근래에 들어서 처음 보는 태양처럼 환한 미소로 내게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과연 약속이라는 이름의 독니에 목을 꿰인 것은 그 아이였을까?, 나였을까?


둘째가 내민 새끼 손가락은 마치 맹독을 품은 독사의 송곳니같이 굽어있었다.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 처럼, 그것이 독이 든 성배임을 직감하고 있으면서도, 괴물의 아가리에 오른손을 내밀어 맹세했던 위대한 전사처럼, 나의 손가락을 둘째의 손가락에 마주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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