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벅.


길을 따라 걷는다. 사실 길이라는 표현은 좀 미묘할 것이다. 난 그저 지령이 시킨 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니까.


나에겐 이름이 없다.


굳이 정확히 하자면, 있긴 했다. 다만 나의 이름, 과거, 추억, 그 모든 것들을 지령의 뜻에 따라 수행자가 되기로 받아들인 후 내팽겨쳤다. 왜냐하면 지령이 그리 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수행자가 된 후 난 '이름 없는 수행자'로 칭해졌다.


나에겐 검지 뿐이었다. 이제는 버려버린 과거에서, 난 뒷골목에 넘쳐날 정도로 많은 흔하디 흔한 고아일 뿐이었으니까. 만약 어떤 대행자가 지령의 뜻이라며 날 거두어주지 않았다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추악함으로 이미 죽었겠지. 그게 도시니까.


고아로 살아갈 땐, 딱히 살아가는 이유가 없었다. 그냥 죽기 싫으니까 매일을 살아갔다. 뚜렷한 목표도 없이, 명확한 길도 없이 아무 생각없이 하루하루를 지냈다.


.....나에게 지령은 진리였다. 날 거두어준, 나 스스로 부모로 여기는 대행자는 항상 지령의 뜻을 따랐고, 나 역시 그를 따라하며 지령을 받아들이고 지령의 충실한 이행자가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행자는 나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밥을 주고, 옷을 주었으며, 그와 같이 살아갔다. 그 모든 것이 나에 대한 마음이 아닌 지령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난 그에게 정과 따스함을 느꼈다.


지령대로 그냥 이러저러 해라, 그 말에 열심히 따르는 건......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령 '밥을 먹어라' 라는 지령이 왔을 때, 평소처럼 밥을 먹는 행위는 아무 생각 없는 행동이 아닌 무언가 의미를 가진 행동이 되었다.


귀찮고 힘들게 무언가를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언제나 지령의 뜻을 따르면 이 삶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나에게 말 한 번 건넨 적 없지만 언제나 부모처럼 따르는 대행자와, 여러 말을 나누며 친해진 얀이라는 전령과, 그리고 항상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지령과 함께하는 삶. 나는 언제나 웃고 다녔다. 대행자도, 언젠가 딱 한 번 나를 보며 웃어준 적 있었다.


"............"


그런 지령에게.



----- '너를 기른 대행자를 죽이고, 그 살을 씹어라.'



'거부감'이 든 건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




"주문하시겠습니까."


지령이 떨어졌다. 에스더 대행자의 말에 따르면, 도서관에 가라고 하였다.


무의식적으로 이를 갈았다. 지령, 언제 어느 때라도 갈 길을 알려준 이정표이며, 나를 파멸시키는 원흉.


하지만 지령을 거부할 수는 없다. 난 지령에 거부감을 품을지언정, 지령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검지였으니까. 그게 내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혐오감이 들면서도 지령의 수행을 준비하던 나에게, 에스더 대행자는 지령을 하나 더 주었다.


'홀로 도서관의 바텐더에게서 칵테일을 받아 마셔라.'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난 다른 수행자들 중에서 혼자 이곳에 왔다.


".....추천으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어떤 칵테일을 마실 지는 지령을 받지 않았다. 지령의 해석은 대행자의 권한이지만, 예외 상황에서 수행자의 해석을 따라도 큰 문제는 없다.


난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싼 안대 탓에 바텐더라는 존재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목소리만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생판 처음 보는 남에게도 호감을 주는,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




----- 그런가, 지령을 해석하겠다.


----- 지령에서는 특정한 '살'을 언급하지 않았지. 날 죽이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뼈를 제외한 모든 근육과 연골, 피부, 혈관을 씹어라. 씹은 후 삼킬지 뱉을지는 자율에 맡기겠다.


----- 지령의 뜻을 행하라. 이름 없는 수행자.




내가 죽인, 내가 살을 씹은, 내가 부모처럼 따랐던 대행자와 닮은 목소리.


묵뚝뚝하고 언제나 굳은 얼굴이었지만, 항상 단 것을 즐겨 먹었던.


항시 각설탕을 챙겨 다녔고, 밥을 먹은 후에는 언제나 설탕을 듬뿍 넣은 초코라떼를 마셨던.


가끔 '내일까지 단 것을 먹지 마라' 라는 지령이 내려왔을 때는, 그답지 않게 시무룩해져 있곤 했던----


우욱.


잠깐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을 뿐이었는데도, 난 위에서 올라오는 구토감을 겨우 참아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쏟아내고 싶었지만, 여기서 토했다가는 바텐더가 분노하여 칵테일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령이 수행되지 않을 일말의 가능성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난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곧 손바닥으로도 전부 가려지는 작은 유리병이 나의 손에 잡혔다. 그 유리병을 여러 번 쓰다듬은 후에야, 난 구토감을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안도하는 나에게 바텐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칵테일은 완성되었습니까?"


"재료 준비는 끝났습니다. 다크 럼(Dark Rum), 벌꿀입니다."


".....외람되지만, 제조의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안대로 눈이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만들어지는 알고 싶습니다."


"물론입니다, 손님."


거짓말이었다. 칵테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따위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난 그저 바텐더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었다.


그것이 타인의 것임을 알면서도, 이제는 들을 수 없는 대행자의......어버이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우선 기주(基酒)가 되는 럼(Rum)은 다크 럼(Dark Rum)으로 준비했습니다. 골드 럼(Gold Rum)을 사용하여도 문제없으나, 이번에 사용되는 벌꿀이 좀 진한 벌꿀이니만큼 럼의 맛이 묻히는 것을 염려하여 색이 짙고 향미가 강한 다크 럼으로 결정하였습니다."


"........."




----- 무엇을 망설이나, 이름 없는 수행자.


----- 얀 전령이 보고 있다. 지령은 수행되어야 한다.




그 목소리가, 바텐더의 말에 겹쳐 들린다.


구토감 탓에 정신이 혼미해져 들리는 환청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난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두 번째 재료는 벌꿀입니다. 벌들에게 설탕물을 인위적으로 주어 만든 사양꿀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단맛과 점성이 강한 것으로 골랐습니다. 셰이커에 다크 럼 48ml 가량, 벌꿀 12ml 가량을 넣고 셰이크합니다."


"........"




----- 억울하지 않냐고? 이상한 걸 묻는군, 지령을 수행하는 데 잡념은 불필요하다.


----- 지령에 기한은 없었으나, 기한이 무제한이라고 적혀있지 않는다면 보통 그 기간은 24시간으로 여기지. 그 시간 내에 언제든 날 죽여라.


----- 이름 없는 수행자. 지령을 무사히 완수하기를 빌지.




검지의 모두가 그랬듯이, 그 대행자도 날 이름 없는 수행자라고 불렀다.


그것이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수행자가 되기 전까지, 그는 날 언제나 이름으로 불렀으니까.


하지만 지령 하나로 나에게의 태도가 변했다. 그 전까지는 당연한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막연한 생각보다도 훨씬 아팠다. 그 대행자와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그라면 다를 것이라 은연중에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게 전부 내 망상일 뿐이라는 현실을 깨닫는 데에는, 한 장의 지령이면 충분했다.


"벌꿀은 낮은 온도에서 주류에 쉽게 섞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칵테일을 만들 때보다도 더 흔들어주어야 합니다. 만약 초심자가 만든다면 도중 여러 번 열어보며 직접 확인하면서 셰이크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충분히 섞은 후, 잔에 따라주면 완성입니다."


......난 결국 대행자를 죽였다.


검을 잡은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수행자는 언제나 안대를 쓰고 다녀야 했기에, 난 대행자의 마지막 얼굴도 볼 수 없었다.


나에게 그 지령을 직접 전해주었던 얀 전령은, 내가 대행자를 죽이고 그의 모든 살을 씹는 것을 전부 보고서 돌아갔다.


얀이 돌아가기 전, 그는 나에게 작은 유리병 하나를 주었다.


내 허리춤에 달린, 무언가가 담긴 작은 유리병.


"시나몬을 추가로 넣어 가니쉬 비슷한 것으로 삼을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생략하겠습니다."


"........."


그 유리병은 대행자의 유품이었다. 얀의 말에 따르면, 대행자가 나에게 주라고 얀에게 맡겨 놓았던 것이라고 했다.


언제나 안대를 쓰고 있어야 했기에, 그 유리병에 무엇이 담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난 항상 유리병을 가지고 다녔다. 잘 때도, 지령을 수행할 때도, 어딘가로 떠날 때도 그 유리병을 허리춤에 붙여 다녔다. 때때로 내가 대행자를 죽이고 살을 씹었던 그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면, 난 필사적으로 유리병을 만졌다.


지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도 하라고 했잖아.


난 죄가 없어. 내 탓이 아니야.....


그의 죽음을 그의 유품으로 버텨내면서, 난 아주 조금이나마 죄악감을 달랬다. 


대행자는 어째서 나에게 이 유리병을 남긴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난 그저 이 유리병을 이용하며 현실에서 필사적으로 도피할 뿐이었다.


"완성입니다, 노 네임입니다."


"....노, 네임?"


내가 바텐더의 말에 반응한 건, 완성된 칵테일의 이름 때문이었다.


바텐더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참한 과거에 사로잡혔던 나는, 그제야 고개를 다시금 들어올릴 수 있었다.


여전히 안대에 가려져 모든 것이 칠흑이었지만, 왜인지 바텐더라는 존재의 미소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네?"


"어떻게 내가 이름이 없는 걸 안 겁니까?"


"........."


나의 의문 너머로, 노 네임이 담긴 잔이 카운터 위에 놓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 후로도 침묵하며 기다렸지만, 바텐더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칠흑과도 같은 침묵이 나를 에워쌌다. 나는 손을 뻗었다.


딸깍.


바텐더가 답해줄 생각이 없다면.


"......칵테일, 감사합니다."


우선, 지령을 행해야 했다.


안대로 가려져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개조 수술로 주변 물체를 오감을 사용하여 대충이나마 구별 할 수 있다. 망설임 없이 칵테일을 손에 든 난 그대로 잔을 입으로 가져가고, 한 모금만을 머금고 삼켰다.


그, 맛은.


맛은.


맛, 은.


".....손님?"


"달아......"


"손님?"


"정말로....달아."


언젠가, 그가 마시던 각설탕을 듬뿍 넣은 초코라떼를 한 입만 달라고 했을 때.


대행자는 여러 번 고민한 후에, 조금만 마시라며 나에게 잔을 건네주었다.


그 초코라떼는 정말로 달아서.....내가 무심코 반이나 마셔버렸을 때는, 난 혼날 거라고 생각했다. 잔을 다시 받아든 대행자는, 우물쭈물하고 있던 나에게 아주 살짝 입고리를 올리면서.


단 걸 좋아하나.


네, 라고 대답하니.


.......다음에는 조금만 마셔라.


그렇게, 어딘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주었다---


"......달고, 맛있....네요...."


".....손님께서, 어떻게 손님의 이름이 없단 것을 아냐고 물어보셨죠."


"........"


"몰랐습니다. 손님께서 이름이 없다는 사정을 가지고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만....."


"....다만?"


".......손님의 허리춤에, 각설탕 몇 개가 담긴 유리병이 있었기에. 단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이 칵테일을 드렸을 뿐입니다."


"....네?"


바텐더의 말을 듣자마자, 난 황급히 허리춤의 유리병을 만졌다. 딸그락. 유리병을 흔들면 그 안에 있는 무언가가 유리병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이게, 각설탕이라고?


난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열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뚜껑을 열고, 손바닥을 편 후에 유리병을 흔든다. 유리병 안에서 무언가 단단한 물체가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지체할 틈 없이 난 그대로 무언가를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씹었다.


달아.


".....달아."


"각설탕이니까요."


"........."


".....손님, 유리병에 무언가 써있습니다."


".....뭐라고, 써져 있나요...?"


"'로버트에게', 라고."


".............."




----- 아저씨는 누구예요...?


----- 대행자다. 지령의 뜻에 따라 널 거두러 왔다.


----- 지령....? 대행자....?


----- 일어나라,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자.


----- 왜 날 데려가는 거예요?


----- ......그것이 지령의 뜻이기 때문이다.


----- .........


----- 이름이 뭐지?


----- .....로버트, 예요.


----- 좋아, 로버트. 넌 이제 괴롭지 않아도 괜찮다. 날 따라와라, 씻겨주고, 먹여주고, 재워주지. 지령이 변하지 않을 때까지, 난 널 돌봐줄 것이다.


----- 어.....아......


----- 내 손을 잡거라, 로버트.





----- 넌 이제, 혼자가 아니야.





*




"...이름 없는 수행자, 지령은 완수했습니까?"


"......완수했습니다. 카스턴 수행자."


"이름 없는 수행자, 안대 밑으로 눈물자국이 보입니다만."


"카스턴 수행자와는 관련없는 일입니다."


"....지령입니다, 이름 없는 수행자."


".....무엇, 입니까?"


"직접 읽어보시죠. 지령을 읽을 때만은 안대를 벗는 게 허용됩니다."


"........................................................."


"이름 없는 수행자?"


"........카스턴 수행자, 조금 멀리 떨어져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


......................


................


...........


.......


....


..



쨍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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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방공호에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