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했어."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어. 추잡하게, 혼자 친구의 관을 붙잡고 살아났을 뿐."



장발의 탁한 노인이 폭력적인 격언을 내뱉는다. 


큰 성량의 목소리가 고래의 안에서 날카롭게 울려퍼진다.


불안으로 조여드는 심상과 덥수룩한 그늘을 짊어진 이스마엘의 어두운 낯빛이


고래의 심장박동을 더 보채는 것 같기만 하다.


울상도 좌절도 우울도 아니었다. 순수한 혐오였다.


자신을 향한.


"너는 그만두겠지. 두려우니까!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저 새끼가..."


"이스마엘 씨! 저 자의 말을 듣지 마세요! 헛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에요!"



***



"...!!...어...?"


"...쯧. 또 거지같은 꿈을..."



트라우마에 익숙이란 단어는 붙이지 않는다. 그러하다면 그건 더 이상 트라우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를 다시 재생하고 기분을 한껏 망치는 행동에서야 익숙을 갖다붙힐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이를 악몽이라 부른다.


절대 유쾌하지 않다. 


식은땀에 젖은 건지, 불안정한 마음에 방 안에서 요동치는 파도에 젖은 건지 모를 이스마엘 처럼.



"...하."



신경질적으로,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문이 열린다.


T사에 가까워지며 채도가 옅어져가는 시야는, 여전히 꿈에 살어리랏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며


금방 표정을 숨기고 인사를 건네곤 한다.



"아, 싱클레어 씨. 아직 계셨네요."


"네, 잠깐 나와있었어요. 다들 업무종료승인 마치고 들어가던 참이라 저도 슬슬 가볼까 해서요."



이스마엘은 싱클레어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좌석에 앉았다.


느리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 풍경을 생각 없이 돌아볼 뿐이었다.



"아, 이스마엘 씨, 잠깐..."


"네...?"


"앗! 자, 잠깐 움직이지 말아보세요."



싱클레어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이스마엘의 옷 어깨 부분에 박힌 나무 껍질을 떼어냈다.



"그, 신경 쓰여가지고... 아-"


"...혹시 방에서 아직도... 파도가 치나요?"


"아..."


"...네, 아주 가끔... 꿈자리가 사나우면 그래요."



서로의 표정에 막연하고 익숙한 어둠이 드리운다.


싱클레어가 중심이었던 세 번째 작전과, 이스마엘이 중심이었던 다섯 번째 작전의 공통점이었다.


개인의 트라우마를 극한까지 건드렸던 그런 것.


증오하는 단 한 명의 악인.


그러나 궁극적 혐오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던 그런 것.



"그 꿈이었던 거죠? U사에서 있었던..."


"...그랬죠. 언제나 적응 안 되는."


"단테에게 내 모든 나침반을 주고, 나도 내 나침반을 보면서 극복해나가나 하지만서도... 가끔 이렇게 발목을 잡아요."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전 그렇게 강인한 사람은 아녜요. 이제 나침반을 볼 줄은 알겠는데, 뭐라고 해야하나..."



나침반을 볼 줄은 알지만 걸을 줄은 모른다.


미워하지 않는 법을 알고 있으나 이미 있던 미움을 거두는 법은 모른다.


완전하다 느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둠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그 예기치 못한 어둠을, 이스마엘은 두려워한다.


다시금 내 배의 키를 뺏길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스마엘 씨, 그거 알아요?"


"뭘요?"


"알을 깨고 태어나는 아기새의 입장에서, 알은 아기새의 온세상이라는 걸요."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부정해야하는 힘듦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이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



이스마엘은 시간을 더듬어본다.


모든 종말이 에이해브로써 온다 믿었던 시절과


이 또한 결국 나의 탓으로 직결되리라 여겼던 찰나와


열린 결말을 남겨둔 앞을 그려본다.


결말의 복선은 과거와 현재에서 비롯된다.


과거와 현재는 내가 알고 있는 전부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세상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그리고 아브락사스는 우리가 이미 만난 적이 있죠."


"다만 그 이름과 같이 완전한 만능은 또한 아니에요.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질문을 던져줬을 뿐일 수도 있고요."



이스마엘의 눈빛이 당황스레 빛난다.


새의 알은 분명 깨진다. 그러나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가는 것은 새의 몫이다.


그것이 날아가지 않겠다 결의하면 그리 된다. 몸이 약해 느리게 가겠다 선택하면 또한 그리 된다. 


이스마엘은 싱클레어가 이미 아브락사스의 손길을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날개를 제일 많이 다친 새인 줄 알았건만.



"어떻게... 어떻게 극복한 거예요?"


"아녜요, 저도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작년 그날에도 제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저도 항상 그날만 되면 그 일이 떠올라서..."


"방향을 찾은 것일 뿐이에요. 같이 임무를 수행하고, 황금가지를 찾고 하면서요."


"...긍정적인 결말, 그러니까, 밝은 세계를 살아야 할 이유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중인거죠."


"..."



이스마엘이 고뇌에 빠진다.


방향은 내 몫이야.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방향에 옳고 그름이 있는가?


있다면, 옳은 것은 무엇인가?


없다면, 나의 과거는 어떤 방향이었노라 정의하는가?


두 개의 세상이 충돌한다. 이스마엘은 아직 밝은 세계가 어색하기만 하다.


이것은 키를 잡은 책임감에 대한 집착인가? 


키를 빼앗길 불안에 대한 대책인가?


*


"당신은...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나아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계속해서... 찾아가는 중이야."


*


"...그래서 얼버무렸던 거구나."



아무도 자기 운명을 예언해놓고 달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탐색이라 부르리라.



"고마워요, 싱클레어. 마음이 좀 정리된 것 같아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에요... 저도 마음이 한결 놓여요."


"그럼에도, 언젠가 또 힘이 든다면..."



싱클레어가 가까이 다가온다. 가까이. 더 가까이.


옷자락이 붙고, 손가락이 닿고, 옷깃이 닿고, 숨이 닿는 위치.


"내면에 귀를 기울여요. 아브락사스는 언제나 같은 말을 하며 기다릴 거예요."


"슬플 때마다, 퀴케그 씨가 보내는 위로라고 생각해줘요. 눈 감아요, 이스마엘."



싱클레어는 이스마엘의 입술에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