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체로 컨디션 별로인 상태로 내용 압축하다 보니 급전개도 좀 심하고 맘대로 갖다붙인 설정도 있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봐줬으면 좋겠음

사람에 따라선 보기 거북한 묘사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잔인한 거 싫어하면 안 보는 게 좋을수도 있음

원래 일본쪽 소설 쓰던 놈이라 라노벨 테이스트가 찐하게 묻어날 수도 있다

참고로 분량은 아카라이브 글자수 기준 26000만자 좀 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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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몰아쉰다.

마치 흥분한 짐승처럼 거칠고 시끄러운 숨소리. 이런 소리를 자기 입으로 내게 될 거라고 상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감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아직 여유가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지만.

생각을 하면서도 아멜리아는 눈에 띈 잔해 뒤로 재빨리 숨었다.


"큭, 아파……."


줄곧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던 오른손을 떼어보니, 덜 마른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상처 자체는 그리 깊지 않지만 계속 손을 대고 있었던 탓이겠지.

시험 삼아 왼팔을 돌려 보니, 조금 아플 뿐 움직임 자체는 지장이 없었다. 그 외엔 오래 달려서 지쳤을 뿐 다친 곳은 없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순간 뇌리를 스친 불길한 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지금은 자포자기할 때가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저 녀석을 처치하는 게 우선이야…… 같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어깨가 떨렸다. 들려온 방향은 잔해 너머 쪽이었다.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당당하고, 마치 우위를 과시하듯 느긋한 발소리. 속도는 느리지만 확실히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선 아멜리아가 여기 있다는 확신이 여실히 드러났다.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못 막은 네가 이제 와서 뭘 어쩌려고? 아니, 이제 와서 뭘 해봤자 과연 의미가 있을까?"


닥쳐.

뻔한 도발인데도 하마터면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어떻게든 그걸 입 안으로 삼키고 품에서 권총을 뽑았다.

날렵한 은색 바탕에, 손잡이에만 보라색 문양이 조각된 리볼버. 자신의 피로 얼룩진 그 문양을 보자 아멜리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하지만 곧 표정을 다잡고는 리볼버를 개방해 탄환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 + + + +




"아메, 넌 얼마나 살아온 거야?"


갑작스러운 이나의 물음에 아메는 입을 벌린 상태 그대로 잠시 굳었다. 그러다 그 입에 넣으려던 햄버거에서 속이 흘러내리려는 걸 깨닫고서야 황급히 내려놓았다.


"갑자기 뭐야?"

"그냥 궁금해서. 넌 지금까지 많은 시간선을 봤잖아?"


이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의문이었다. 아메도 그걸 이해했다…… 기보다도, 그런 질문을 받은 게 처음도 아니었기에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시간선 하나하나를 정성껏 살아가는 건 딱히 아니야. 아마 1분도 머무르지 못한 시간선도 있었을걸."

"그래서 얼마란 거야?"

"글쎄, 다른 시간선에서 보낸 시간을 다 세어본 적은 없는데. 아마 겉보기 그대로일 거야. 그러는 너도 사람을 벗어난 힘을 얻었다고 해서 수명까지 늘어난 건 아니잖아?"

"글쎄, 모르겠어. 그걸 확인할 만큼 나이를 먹진 않았으니까."


이나는 아메의 흐트러진 햄버거를 촉수로 정돈했다. 아메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든 생각을 입에 담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둘 다 사람 같지 않은 힘을 갖고 있네."

"그러게. 다른 애들은 애초에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그 말에 아메는 이 자리에 없는 '친구'들을 떠올렸다. 죽음의 힘을 지닌 사신, 죽음을 모른 채 기억조차 못할 세월을 보내온 불사조, 그리고 심해에서 찾아온 귀여운 상어까지.

그들을 대하는 마음이 처음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게 과연 좋은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힘을 가졌다고 해도, 우리 인생까지 사람의 것을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뭐야, 갑자기 그런 얘길 하고. 그보다 사람이 아닌 애들이 옆에 붙어 있는 시점에서 이미 사람의 삶은 아닌 거 아냐?"

"몸이 어떻게 되고 누굴 사귀게 되어도, 마음이 사람임을 잊지 않는다면 여전히 사람이라고 생각해."

"어이구, 네네. 제가 산속의 현자님을 몰라뵈었습니다요."


아메가 장난스럽게 빈정거리자 이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촉수들 속을 뒤지더니 작은 상자를 꺼내서 아메에게 건넸다.


"갑작스럽지만 선물이야."

"응? 뭐야, 진짜 갑작스럽네. 지금 열어봐도 돼?"

"응."


상자를 열어보니 꽤 말끔하고 고급스러운 리볼버가 나왔다. 전체적으로 깨끗한 은빛이었지만, 손잡이 부분에 데포르메된 보라색 우무문어가 조각되어 있었다. 평소 이나가 마스코트로 그리는 캐릭터인 타코다치다.


"이건……."

"살짝 힘을 담은 총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탄환이랑도 잘 맞을 거야."

"선물은 고마운데…… 왜 갑자기 이런 걸 준비한 거야?"

"음, 뭐랄까……."


이나는 조금 말하기 어려운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침묵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우린 여러모로 어떤 일이든 휘말릴 수 있으니까. 이런 거 하나쯤 갖고 있어도 나쁠 건 없지 않을까? 게다가 넌 여러 시간선을 돌면서 여러 일을 겪으니까."

"……응, 고마워. 잘 쓸게."


아메도 단지 갑작스러워서 놀랐을 뿐, 총 자체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가타부타 따질 것 없이 고맙게 받았다.

……고대 신의 힘이 담긴 총을 쓸 사태 따위, 웬만하면 안 생길 거라고 생각하면서.




+ + + + +




"……이나."


아멜리아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이나의 걱정은 옳았다. 아마 그녀도 이 정도의 사태까지 상정하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무시무시한 위협이 나타났으니까.


……이 총으로 친구들을 지킬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과 함께 리볼버를 원래 상태로 되돌린 순간,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 다."


그 순간, 아멜리아는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도 빠르게 팔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 위로 접근한 기척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곧 눈앞의 공간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멜리아의 것보다 긴 금발과 푸른 눈. 본래 예쁘고 단정했을 이목구비는 조금 수척했지만, 눈빛만은 이상할 정도로 형형했다. 옷은 지금 아멜리아가 입고 있는 것과 똑같았지만, 마치 오랜 세월이 지난 듯 낡은 데다 옷과 머리카락 곳곳에 흑갈색 얼룩이 말라붙어 더러웠다. 게다가 목덜미엔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한 흉터까지 있었다.

엉망인 모습…… 이라고 하면 간단하겠지만, 엄청나게 고생을 한 자신 같다고 하면 그렇게 간단히 일축할 수가 없다.


"다짜고짜 시간추적탄이라니 너무하잖아."

"흥. 시간을 뛰어넘어서 도망치는 쥐새끼를 잡으려면 이게 제일이거든."

"뭐, 그건 나도 인정하지만 말이야."


'아멜리아'는 말을 맺자마자 다짜고짜 총을 갈겼다. 아멜리아는 방아쇠가 다 당겨지기도 전에 곧바로 회중시계의 버튼을 눌러 2초 뒤의 미래로 도망쳤지만, 탄환은 마치 그녀를 따라 시간을 도약하듯 쫓아와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이번엔 깊다.


"윽?!"

"네가 할 수 있는 걸 내가 못할 리가 없잖아?"


'아멜리아'는 그렇게 비웃으며 아멜리아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아멜리아는 마주 총을 겨누면서도 '아멜리아'의 총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저쪽도 리볼버이긴 했지만, 디자인이 아멜리아의 것과는 달랐다. 게다가 잘 안 보이긴 해도 손잡이 쪽에 보라색 타코다치 문양이 없다. 그렇다는 건 이나가 준 총은 아니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다음은 무슨 탄환일까? 한 번 맞춰봐."

"관심 없거든!"


두 사람의 총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멜리아의 탄환에서 시커먼 안개 같은 기운이 급격히 퍼져 '아멜리아'의 탄환을 잡아먹었다. 안개는 그대로 '아멜리아'까지 집어삼키려는 듯 이빨을 드러냈다.


"흥."


'아멜리아'가 손을 내저은 순간, 안개는 마치 TV를 꺼버린 듯 뚝 하고 사라져버렸다. 다른 시간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아멜리아의 모습은 다시 사라진 상태였다.


"참 나, 하여튼 도망치는 건 빠르다니까."


'아멜리아'는 불평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히죽거리며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 + + + +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불꽃 같은 머리에 연녹색 그라데이션이 들어가 있는 소녀가 활짝 웃고 있었다. 키아라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더니, 그대로 본인까지 아메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뭐야, 치킨버거는 주문했지만 치킨을 주문한 적은 없는데?"

"난 치킨이 아니라 불사조야!"

"네네, 불사 치킨 점장님. 가서 일이나 하세요."

"너희가 오늘 마지막 손님이야!"


그러더니 키아라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감자튀김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진 아멜리아가 슬쩍 카운터 쪽을 보니, 직원은 키아라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을 뿐 참견해오지 않았다.

하기사 키아라가 이러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니 이제 와서 가타부타 따져봤자 의미가 없긴 하다.


"뭐야, 내 돈 내고 산 걸 왜 네가 먹어?"

"서비스로 닭다리 몇 개 가져왔으니까 봐줘. 어차피 너희 다 못 먹을 거잖아."

"다 못 먹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서비스는 뭐하러 가져온 거야?"

"같이 먹으려고. 그게 아니었으면 직접 갖다주지도 않았지."


뻔뻔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굴어도 그다지 밉지 않은 게 특징이랄까. 애초에 따지고 보면 서비스로 가져온 닭다리가 더 비싸지만.


"그건 그렇고 무슨 얘길 하고 있었던 거야? 이나가 뭔가 준 것 같던데?"

"보고 있었어?"

"당연하지!"


그러더니 키아라는 아메가 옆에 둔 상자에 눈독을 들였다. 아메는 한숨을 쉬며 상자를 건네주었다.


"뭐야 이거? 이나가 만든 총이야?"

"총을 내가 만든 건 아니고, 그냥 살짝 힘을 좀 넣었어."

"우와, 부럽네. 갑자기 이런 건 왜 만든 거야?"

"그냥……."


이나가 간단하게 대화를 정리해서 얘기해주자, 키아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다가 눈을 빛냈다.


"그거 좋네! 하긴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네가 말하니까 무게감이 다르네."

"후후, 불사조의 생활의 지혜란 거야!"


키아라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조금 큰 깃털을 두 장 꺼냈다.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연녹색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불꽃색 깃털이었다.


"이거 줄게!"

"뭐야 이거? 설마 네 깃털이야?"

"맞아! 부적이라고 생각해!"

"이거 갖고 있으면 우리도 안 죽는 거야?"

"물론 아니지!"


이나의 장난스런 물음에 키아라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상처를 낫게 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어. 깃털에 힘이 남아 있는 만큼은."

"뭐야, 소모품이야?"

"아무렴 어때? 다 쓰면 내가 또 주면 되지!"


그 말에 아메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불사조인 키아라라면 다 쓸 때마다 다시 주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키아라가 사라지는 것보단 아메 자신이 먼저 죽는 게 더 가능성 있을 테니까.




+ + + + +




아멜리아는 불길에 휩싸인 채 이를 악물었다.

물론 뜨거워서…… 는 아니다. 이 불은 그녀를 해치는 불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어깨의 상처들이 사라지고 옷마저도 다시 깨끗해졌다. 마치 불길이 상처와 더러움을 모두 태워 없애버린 것처럼.


"고마워, 키아라."


키아라의 깃털을 넣어놓은 주머니를 누르며 짧게 예를 표하고, 다시 리볼버를 열어 재장전을 끝냈다.

도망치긴 했지만 애초에 멀리 오지도 못했다. 지금도 그저 아까처럼 잔해 뒤에 숨어 있을 뿐. 벌써부터 '아멜리아'의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판이다.


"괜히 시간 낭비는 하지 말지?"


비웃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때를 기다린다.

하나, 둘, 셋. 사전에 예상한 지점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진 순간, 총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시간도약탄. 시간선을 뛰어넘어 과거를 저격할 수도, 미래를 꿰뚫을 수도 있는 이 마탄은 아멜리아의 특기 중 하나다. 정확히 예상한 타이밍에 예상한 지점으로 '아멜리아'가 온 순간, 과거에 쏴 두었던 마탄이 지뢰처럼 그녀를 덮쳤다.


"흥."


'아멜리아'가 코웃음을 친 순간, 아멜리아는 공격이 실패했을 거라 판단하고 곧바로 다음 수를 실행했다.

그녀의 손 안에서 철커덕 하는 소리가 울리고…….




+ + + + +




자리에 앉은 칼리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그것 때문에 사람을 느닷없이 불러냈다고?"

"너 사람 아니잖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거 참……."

"뭐야, 아메랑 이나의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그런 뜻은 아니야. 단지 급하게 불러낼 일은 아니란 거지."


칼리의 말에 이나는 쓴웃음을 지었고, 아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키아라가 호들갑을 떨며 칼리에게 전화해서 불러냈을 땐 두 사람 다 어이가 없었지만, 키아라의 텐션이 수상할 정도로 높아서 차마 말리지 못했었다.

하지만 키아라는 여전했다.


"왜 아니야! 당장 오늘밤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건…… 뭐,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서 수긍하지 마, 칼리."


아메가 딴죽을 걸었지만, 칼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을 따진다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제로는 아니야. 오래 살다 보면 별 희한한 꼴을 다 보거든. 키아라의 말도 영 근본없는 헛소린 아니야."

"그렇지? 역시 칼리밖에 없다니까!"

"치워."


키아라가 칼리를 끌어안으며 뽀뽀를 퍼부으려 하자 칼리는 질색을 하며 밀어냈다. 그러면서도 한손으로는 검은 연기 같은 힘의 덩어리를 펼치더니 그 속을 뒤졌다.

이윽고 꺼낸 것은 마치 깨진 거울 파편 같은 금속 조각이었다. 그녀는 그 조각들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선물이야. 생긴 게 볼품없어서 미안해. 그래도 성능은 확실할 거야."

"이게 뭐야?"

"죽음의 힘이 담긴 조각이야. 왓슨의 개념에 비유하자면 대상의 시간을 끝내는 힘이지. 죽음이란 건 말하자면 그 사람의 시간이 영원히 끝난다는 거니까. 아, 사람한테 직접 쓰는 건 안 되게 해놨어."

"그런 짓 안 해."


아메는 받은 조각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생긴 것만 보면 진짜 그냥 뭔가 부서진 파편 같았다. 아마도 사신의 힘을 지닌 무언가에서 떼어낸 것일까.

어떻게 쓰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라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조각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게 살짝 흘러나왔다. 시험 삼아 그 위로 감자튀김 하나를 떨어뜨렸더니, 딱 연기에 닿은 곳에서 멈췄다.


"이거 재밌는데?"

"잠깐 멈추는 정도이긴 하지만, 급할 땐 도움이 될 거야. 뭐든 멈출 수 있거든."


써먹기에 따라선 진짜 위험한 일도 가능하겠는데. 나한테든, 상대방한테든.

그런 생각이 든 아메는 한 번 제대로 연구를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 + + +




아멜리아가 잔해에서 몸을 내미는 것보다 먼저, 마치 일대 전체를 날려버리려는 듯 어마어마한 탄막이 쏟아졌다.

투다다다! 콰광! 하고 굉음이 울리고, 사방의 파편이며 지면 등이 엉망으로 터져나갔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며 포탄의 향연 앞에선 아멜리아가 숨은 잔해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항해 아멜리아는 작은 금속 조각을 꺼냈다. 거기에서 뿜어나온 사신의 힘이 마치 장막처럼 펼쳐져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그렇게 포화가 그칠 때까지 견딘 아멜리아는 곧바로 장막을 거두고 무기를 갈겼다. 시간의 마탄을 한가득 장전한 돌격소총을.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갑자기 날아온 탄환이 아멜리아의 사지와 옆구리를 연달아 꿰뚫었다.


"윽?!"

"말했잖아?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다고."


시간도약탄인가.

아까 탄막을 퍼부을 때 슬쩍 섞어놨겠지. 아멜리아는 낚인 것에 화가 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기 쉬운 사용법을 경계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였다.

그렇다, 알기 쉬운 사용법이다. 그야말로 아멜리아 자신도 똑같이 생각했을 만큼.


피융! 하고 총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몇 번이나 울리고, 아까 섞어 쐈던 시간도약탄이 '아멜리아'를 덮쳤다. 어떤 힘을 지니고 있든, 몸은 평범한 사람인 이상 이미 날아가고 있는 총알엔 대응할 수 없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총알은 그녀의 지척에 다다른 순간 알아서 사라져버렸다.


"?!"

"후후후.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지만, 네가 못하는 걸 나도 못하는 건 아니거든."


자세히 보니 아주 희미한 반투명 에너지막 같은 게 '아멜리아'를 둘러싸고 있었다. 총알이 거기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아멜리아'의 주위엔 온갖 총이나 중화기 같은 것들이 둥둥 떠 있었다. 아까의 탄막은 저것들로 퍼부은 거겠지.

'아멜리아'는 마치 그 광경을 자랑하듯 양팔을 펼쳤다.


"어때? 온갖 시간선을 돌며 모은 무기야. 뭐 이 정도는 너도 있겠지만, 두 팔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네."


'아멜리아'는 아멜리아가 들고 있는 총을 보며 비웃었다.

그 말대로긴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밀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아멜리아'의 표정만 봐도 분명했다.


"……근데 그 불은 뭐야? 불 주제에 왜 타죽지 않는 거야? 오히려 낫고 있네. 아까도 기분 나쁜 기운으로 내 탄막을 막았고."


……역시나.

아까 리볼버를 봤을 때 설마 했지만, 지금의 반응을 보면 역시나인 것 같다.

하지만 아직 그걸로 승산을 뽑기엔 준비가 부족한데…….

그렇게 생각한 아멜리아는 '아멜리아'의 무기들이 다시 불을 뿜기 전에 먼저 회중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또다시 시간을 뛰어넘어 '어떤 장소'에 이동한 후, 곧바로 시간의 힘을 이용해 시간선 이동을 봉쇄했다.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잠깐 정도는 '아멜리아'의 추격을 막을 수 있겠지.

그렇게 한숨 돌릴 여유를 얻고서, 아멜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괴된 지 얼마 안 된 듯한 폐허였다. 곳곳에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들이 널브러져 있고, 천장이며 벽 곳곳이 불에 탔거나 무너진 상태였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지만, 다행히 그 후로 추가로 무언가 다른 피해를 입진 않은 모양이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온갖 파편이 밟혀 걸음을 방해했지만, 아멜리아는 망설임 없이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면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굴뚝 같지만, 가지 않으면 지금 필요한 걸 얻을 수 없으니까.

엉망으로 흩어진 햄버거가 발에 밟힌 순간, 그 모습이 아멜리아의 눈앞에 펼쳐졌다.




+ + + + +




"그러고 보니 구라는? 혹시 못 봤어?"

"너 설마 구라까지 부른 거야?"

"물론!"


키아라가 가슴을 펴며 말하자 칼리는 한숨을 쉬었다.


"이봐, 지금 네 KFP도 폐점할 시간 다 되어간다는 거 알아?"

"나올 수 있는지 물어보고 불렀다구. 너한테도 물어봤잖아?"

"그거야 그랬지만, 내 말은 애초에 사전 약속도 없이 이런 시간에 다짜고짜 전화해서 나올 수 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니란 거야."

"그치만……."


키아라가 무어라 말하려 했을 때 KFP의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들어온 사람은 파란 상어 후드티를 입은 자그마한 소녀였다.


"안녕. 뭐야, 다들 모여 있었네."

"구라! 마침 잘 왔어!"


키아라는 구라를 앉히자마자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그리고 끝까지 들은 구라는 꽤나 흥미가 동한 듯 눈을 빛냈다.


"재밌겠는데? 그럼 이제부터 우리끼리 역경을 뚫는 모험 같은 걸 하는 거야?"

"아니, 왜 무조건 사건이 터질 거란 전제로 얘기하는 거야?"

"무조건 터지잖아? 언제인지는 몰라도."


아메는 혀를 찼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9천 살 노친네였지. 외모도 행동도 제일 어려 보여서 자주 잊어버리고 만다.

한편 구라는 칼리와 키아라의 선물을 보고 고심에 빠졌다.


"난 너희한테 줄 만한 적당한 물건이 없는데."

"꼭 뭘 주고받자고 모인 자리는 아니야. 나도 아메 말고 다른 애들한텐 아직 아무것도 못 줬어."

"난 아예 하나도 뭘 준 게 없는데."


이나와 아메가 그렇게 말했지만 구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끙끙댔다.

귀여운 모습이지만, 그 상태 그대로 뭐라도 선물을 내놨다간 아메 혼자 아무것도 못 주고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제풀에 압박감을 느낀 아메는 뭔가 내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구라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좋아! 이거면 될 것 같아!"


구라가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건 작고 파란 구슬이었다. 반짝이는 게 제법 예쁘긴 하지만, 아메로선 딱히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설령 그런 힘이 있다 한들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건 뭐야?"

"아틀란티스의 힘을 부르는 구슬이야!"


그게 대체 뭔데.

순간 그렇게 생각한 아메는 다른 친구들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 다들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대표로 키아라가 손을 들었다.


"어, 구라야? 아틀란티스의 힘을 부르는 게 뭐야?"

"아틀란티스의 사람이나 물건을 부를 수 있어. 사람을 부르면 달려가줄 수 있고, 물건을 부르면 잠깐 그걸 쓸 수 있어. 그런 느낌이야."

"이 경우엔 널 부르면 네가 와준다는 건가?"


칼리가 묻자 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덤으로 내 창도 쓸 수 있어!" 같은 말도 했지만, 듣고 있던 아메는 구라의 창 같은 건 본 적도 없다는 감상밖에 안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아메에게도 제법 영감을 주는 소재였다.


"좋아, 나도 괜찮은 걸 줄 수 있겠어."


아메가 회중시계의 버튼을 몇 번 누르자, 시계에서 푸르스름한 빛의 입자가 흘러나오더니 다른 네 명에게 흘러들었다.


"타임 앵커야. 원래는 특정 시간선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 시간 좌표를 고정하는 용도지만, 사람한테 쓰면 언제든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거든. 반대로 앵커가 새겨진 사람이 날 부를 수도 있어."


"오, 그럼 심심할 때 아메를 부를 수 있는 거야?"

"키아라, 헛소리는 하지 말고. ……어쨌든, 무슨 일이 일으면 언제든 불러줘. 내가 바로 해결해줄 테니까."

"오, 우리 탐정님 듬직해!"


키아라의 반응이 좀 호들갑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좋아해주는 것이 아메로서도 기뻤다.

온갖 힘을 가진 이 친구들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적어도 앵커를 심어준 이상 어떤 일이든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생각이 착각이라는 걸, 그때의 아메가 상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 + + +




변함없는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축 늘어진 촉수와 이마에 뚫린 커다란 구멍. 감기지 못한 눈은 공허했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 말라붙은 피가 마치 피눈물 같았다.

그리고 그 근처엔 자그마한 형체가 있었다. 왼팔과 오른다리가 아예 없어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부분도 엉망으로 뒤틀리고 훼손되어 있었다. 찢어지고 피범벅이 된 상어 후드가 없었다면 누군지 알아보는 것조차 어려웠겠지.


아멜리아는 입을 막고 주저앉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과 함께 눈물이 치밀어올랐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끅끅거리는 소리가 구역질인지 오열인지 스스로도 분간이 안 된다.

이 자리에 있는 시신이 둘뿐이라는 것에 안심해야 할지, 나머지 둘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해야 할지, 머리 한구석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냉정한 자신을 두들겨패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아멜리아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곤 기어가듯 시신에 다가갔다. 정신이 없어서 미처 감겨주지도 못했던 눈을 감겨주고, 품속을 뒤져 칼리의 조각과 키아라의 깃털을 찾아냈다.

키아라의 깃털은 한쪽은 완전히 빛을 잃었지만, 다른 쪽은 힘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마 즉사해버려서 치유고 뭐고 못한 거겠지. 하지만 칼리의 조각 쪽은 양쪽 다 힘이 남아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것들을 갈무리한 후, 문득 생각이 나서 구라의 구슬을 꺼냈다. 

주인은 이미 빛을 잃었는데도 구슬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빛나는 모습이 얄밉다. 그래도 아멜리아는 그 빛에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구라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걸 지금 바라는 건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구라가 말한 대로 이 구슬이 아틀란티스의 '힘을 부르는' 구슬이라면, 어쩌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돌연 손 안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서 손을 다시 펼쳐보니, 구슬에서 흘러나온 빛이 눈앞에 모이더니 길쭉한 형상을 만들었다. 이윽고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길이가 미묘한 삼지창이 나타났다.


"이건……."


무심코 중얼거리다 이를 악물고 창을 쥐었다.

아마도 이게 구라가 말했던 창이겠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구라의 힘에 대해선 약간이나마 조사해본 적이 있었다. 대충 어떤 힘을 지녔는지도 상상이 갔다.


아멜리아는 회중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원래는 시간을 여행하기 위한 타임머신이지만, 응용하면 시간선의 틈새에 물건을 보관할 수도 있다. 아멜리아는 이미 많은 물건을 수집해서 그런 시간 창고들에 보관했고, '아멜리아'가 내보인 수많은 무기도 마찬가지겠지.

거기에 구라의 삼지창을 넣은 후, 아멜리아는 잠깐 고민하다 다른 시간 창고를 열었다. 정말로 소중하고 잃어버려선 안 되는 것들만을 모아둔, 말하자면 아멜리아의 보물고다.

아멜리아는 시신들을 한 번씩만 끌어안은 다음, 그 시간 창고에 시신들을 넣고 창고를 닫았다.


"……미안해. 애도는 나중에 할게."


마지막으로 리볼버를 개방해 탄환을 확인한 후, 그중 2개를 꺼냈다.

아멜리아의 3가지 마탄 중 마지막의 탄환인 시간추방탄이다. 탄환 자체가 방식은 달라도 시간선을 뛰어넘는 다른 두 탄환과 달리, 이 탄환은 그런 기능은 없다. 대신 맞은 대상을 다른 시간선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배제의 탄환이다.

이론적으로는 우주가 탄생하기도 전이나, 반대로 우주가 멸망한 아득한 미래로도 보낼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짓을 하려면 아멜리아가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의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흔적을 조사한 아멜리아는 '아멜리아'가 바로 그 능력을 이용해 키아라와 칼리를 배제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 흔적을 조사했다. 즉 아멜리아는 그 모습을 직접 지켜보지도 못했다.


"왜…… 날 불러주지 않은 거야?"


친구들이 죽어가는 동안 아메는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그저 칼리와 키아라에게 심었던 타임 앵커가 갑자기 사라진 걸 느끼고 이곳에 왔을 뿐. 그리고 그땐 이미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아멜리아를 부르지 않은 건, 아마 그녀를 위해서였겠지. 아멜리아가 친구들을 돕고 싶어하는 것처럼, 친구들은 아멜리아가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걸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그 사실이 아멜리아의 마음을 몰아세웠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아멜리아는 모든 걸 던져버리지 못하고 계속 '아멜리아'에게 대적할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힘을 그저 탄환에 담을 수밖에 없는 아멜리아와 달리 '아멜리아'는 스스로 힘을 다룰 수 있는 것 같았다. 공격을 날려버리던 장막이라던가.

도대체 '아멜리아'가 무슨 수로 그렇게 강력한 시간의 힘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대응책을 생각해야겠지.


……하지만, 이길 수 있는 걸까.

시간의 힘은 저쪽이 압도적으로 우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멜리아와 달리 '아멜리아'는 친구들의 힘을 쓰지는 못하는 모양이라는 것.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승산이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세한 전략을 세우기엔 이미 시간선 봉쇄가 끝나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아멜리아'가 넘어오겠지. 이제 와서 새로운 힘을 얻을 방법도 없다.

생각하던 아멜리아는 문득 왓슨가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모든 시간의 바깥에는 그 시간을 다스리는 군주가 있다. 시간을 남용하는 자는 그 군주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힘을 신중하게 쓰라는 의미로 경각심을 주는 말.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시간의 군주가 실존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멜리아는 굳이 따지면 믿지 않는 쪽이었지만…… 가끔 생각한 적은 있었다. 어쩌면 넘쳐나는 시간선들의 균형을 지키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하던 아멜리아는 회중시계를 꺼내 설정을 조작했다. 그야말로 우주의 시작 이전, 혹은 멸망 이후…… 그보다도 더 먼, 존재조차 잴 수 없을 정도로 먼 시간을 향해서.

원래라면 이대로 여행을 해봤자 시계가 고장나고 끝나겠지만, 어차피 그대로 싸움에 임해도 승산은 낮다. 그렇다면 차라리 도박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반쯤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그렇게 생각한 직후, 눈을 한 번만 질끈 감았다 뜨고, 아멜리아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버튼을 눌렀다.




+ + + + +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로구나. 감히 나의 신전을 범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지."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눈을 떴다.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자다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 처음부터 일어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마치 무언가가 머리에 끈적하게 들러붙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놀라운 건 주변의 광경이었다. 마치 온갖 시계를 기워 만든 듯 이상하게 생긴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고, 벽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 짙은 아지랑이가 그 공간을 넓게 둘러쌌고, 아지랑이 너머로 가끔 시곗바늘이나 톱니바퀴 같은 모습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늘어선 기둥들의 끝에 한 소녀가 있었다.

짙은 쪽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였다. 외모만 보면 평범한 사람 같지만, 머리에 짊어진 거대한 시곗바늘이 미묘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뭔가 범접하기 어려운 위압감 같은 걸 뿜어내고 있었다.

멍하니 그 소녀를 바라보던 아멜리아가 입을 열었다.


"성공…… 한 건가?"

"아니, 실패했다. 단지 분수에 맞지 않은 소원을 밀어붙이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내가 자비를 베풀어주었을 뿐이다."

"당신은…… 시간의 군주입니까?"


아멜리아가 그렇게 묻자, 소녀는 조금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글쎄. 내가 스스로 시간의 군주라 칭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네가 찾는 게 모든 시간선을 다스리는 시간의 현신이라면, 그게 나라는 대답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군."

"……!"


무심코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던 아멜리아였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힌 듯 나아갈 수 없었다. 소녀는 그런 아멜리아에게 냉혹한 눈빛을 보냈다.


"함부로 다가오려 하지 마라. 한낱 미물이 마음대로 범접해도 될 내가 아니다."

"……죄송합니다."

"후후, 재미있구나. 그렇게 깍듯한 아이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내게 얻고 싶은 게 있어서인가?"

"절 아십니까?"

"감히 모든 시간의 감시자인 내게 무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냐?"


말투가 뭐 저래.

비웃음이 역력한 말이 거슬렸지만, 상대가 정말 시간의 군주라 전해지는 그자라면 함부로 대할 순 없다. 그래서 아멜리아는 최대한 말을 골랐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흥, 그 정도도 허락하지 못할 거였다면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디 해보거라."

"제 시간선을 습격한 또 다른 제가 있습니다. 그 녀석은 저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게 된 거죠?"

"어떻게, 라."


소녀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하지만 모르거나 고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렇다기보단 마치 감질나게 하려는 듯 말할까 말까 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멜리아가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만 있자,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흥이 깨지는 녀석이구나. 뭐 좋다, 대답해주마. ……라곤 해도 특별히 할 말은 없다만."

"무슨 뜻이죠?"

"그 아이는 그저 자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 결과 어떠한 힘을 얻고 어떠한 모습으로 영락하였건, 그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일 뿐이지."

"그 선택이 어떠한 거였는지는 가르쳐주실 수 없나요?"

"자세한 이야기를 굳이 해줄 이유는 없다. 하지만 힌트 정도는 주도록 하지. 그 선택은 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멜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선무당 같은 소리나 듣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하지만 역정을 내면 저 얄미운 군주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재미있어할 것 같아서 더 싫었다.


"혹시 그 녀석도 이곳에 왔습니까?"

"글쎄다. 여기 온 인간이 너뿐인 것은 아니지만, 여기 온 '아멜리아 왓슨'은 한 명뿐이다."


그렇다는 건 '아멜리아'는 이곳에 오진 않았다는 걸까.

소녀의 대답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지만, 문답을 거듭해봤자 뚜렷한 대답은 듣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아멜리아는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힘을 원하느냐?"

"네. 그 빌어먹을 녀석을 확실하게 죽여버릴 수 있는 힘을 원합니다."

"재미있구나. 그 아이도 결국 다른 시간선의 너일 텐데."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녀석은 제 친구들을 모두 죽였고, 제겐 친구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게 아니어도 어차피 그 녀석은 저도 노리고 있으니, 살아남기 위해서도 이겨야 하고요."

"……후후."


소녀는 아멜리아의 대답을 듣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작은 웃음 정도였지만, 이내 고개를 젖히며 공간 전체에 울려퍼질 정도로 큰 폭소가 되었다.


"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재미있구나! 역시 넌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


쓸데없는 웃음 집어치워. 힘을 내놔.

그런 생각을 꾹 누른 채 대답을 기다렸다. 그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걸까, 소녀는 곧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아멜리아를 보았다.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어려 있었지만.


"좋다. 한낱 인간이 내 신전을 범하려 한 것도 모자라 내게 자기 소원을 밀어붙인 용기를 봐서라도, 내 특별히 은총을 내려주도록 하지. ……과연 훗날의 네가 이걸 고마워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녀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그 손끝에서 푸른 빛의 입자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아멜리아의 눈앞까지 천천히 이동하더니 멈췄다.


"시간의 힘이다. 우선은 그걸 취해라. 그 후엔 너 자신의 힘으로 직접 휘둘러도 좋고, 너의 도구에 옮겨 담아도 좋겠지. 어떻게 쓰든 너의 자유다."

"……감사합니다."


설마 이런 형태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해보고 싶은 작전이 생겼다. 이런 형태인 걸 오히려 고마워해야겠지.


"그리고 하나 조언을 해주마. 네가 가진 시간의 비보는 다른 시간의 비보의 힘을 취할 수 있다. 그리하면 네 비보는 더욱 강력해지겠지. ……누구의 무엇을 취할지는 너의 선택이지만 말이다."


그러더니 소녀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아멜리아의 바로 옆에 동그란 포탈이 열렸다. 그 너머엔 여기 오기 직전까지 있었던 폐허가 있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가서 너 자신에게 한 번 도전해보거라."


힘을 얻고, 덤으로 돌아갈 방법까지 알아서 제공해주다니, 그야말로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왜 이런 서비스를 해주는지가 너무나도 수상했다.


"어째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무어냐? 불만인 것이냐?"

"아뇨, 도움을 주신 것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간선을 관리하는 시간의 현신이라는 분이 고작 인간 하나의 소원에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미물의 기준은 참으로 협소하기 짝이 없구나. 너에겐 '이렇게까지'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겠지만, 내게 있어선 숨을 쉬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오히려 네가 보여줄 재미에 비하면 이건 관람료도 못 될 정도지."

"재미…… 라고요?"

"그래, 재미."


소녀의 입술이 활처럼 휘었다. 지금까지 중 가장 크고, 불길한 미소. 까닭 모를 오한이 아멜리아를 덮쳤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그 오한의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소녀가 먼저 포탈을 가리켰다.


"이제 나가거라. 솔직히 나는 상관없다만, 미물을 계속 내 신전에 두면 시끄럽게 구는 녀석들이 있거든. 어차피 원하는 것은 얻지 않았더냐?"

"……감사합니다. 녀석을 이기게 된다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하, 인간 따위가 내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소녀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그리 말했지만, 말과 달리 얼굴은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정작 그걸 본 아멜리아는 기쁨보다 불안을 느꼈지만.


"어차피 널 도운 것은 내 재미를 위해서다. 그러니 날 즐겁게 해다오, 모래시계의 아이야."

"……최선을 다해보죠."


그 말을 끝으로 아멜리아는 포탈에 뛰어들었다. 평소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감각과 함께 몸이 어딘가로 급격히 끌려갔다.

그 도중, 희미하게 어떤 목소리가 들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대하고 있으마. ……이번에도 말이지."


……그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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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현신의 신전에서 돌아온 아멜리아는 받은 힘을 이용해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소총 한 자루만을 든 채 폐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아멜리아'를 기다렸다.

기습은 준비하지 않았다. 어차피 안 통할 테니까.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아멜리아'는 가만히 기다리는 아멜리아를 보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마지막 결전을 치를 장소로 여길 고르다니, 친구들이랑 같이 잠들고 싶었어?"

"지랄. 네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내는 걸 애들한테 보여줄 거야, 이 망할 년아."

"가능하겠어? 네가? 시간도약탄을 미리 써놓지 않은 걸 보고 주제는 파악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딱히 아니네."

'아멜리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폐허 안의 모든 곳에 총기가 나타났다. 그 모든 총구가 일제히 아멜리아를 겨누고 있었다.

"어느 총에 맞아서 죽을래? 선택할 시간 정도는 줄게."

"거 고맙네. 그럼……."


아멜리아는 망설임 없이 회중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거의 동시에 '아멜리아'의 무기들이 불을 뿜었지만, 그땐 이미 아멜리아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다음 순간, '아멜리아'의 등 뒤에서 아멜리아가 나타났다.


"흥."


마치 예상한 듯 '아멜리아'의 총이 등 뒤로 발포되었다. 총탄이 아멜리아의 옆구리를 꿰뚫고…….




+ + + + +




아멜리아는 엉뚱한 곳을 쏘는 총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멜리아'를 향해 소총을 갈겼다. 그 공격은 '아멜리아'를 둘러싼 방어막에 막혔지만, 그걸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시간을 이동했다.

그러나 나타난 곳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수많은 총구가 집중되어 있었고…….




+ + + + +




첫 공격을 피하려 했던 아멜리아는 자신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총구를 보고 경악했다.

울리는 총성, 그리고 튀어오르는 피. 꿰뚫린 팔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고, 시간 창고에서 꺼낸 폭탄을 사방에 뿌렸다. 폭음이 연달아 치솟으며 '아멜리아'의 무기들이 부서지고 폭연이 사방을 가렸다.

그러나 마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멜리아의 눈앞에 새로운 총이 나타났다.

총구의 섬광이 눈을 찌른 순간 아멜리아는…….




+ + + + +




폭연 속에 총이 나타났지만, 그때 이미 아멜리아는 옆으로 피한 상태였다. 동시에 상처 하나 없는 양팔로 그 총을 낚아채 빼앗았다. 그 총을 '아멜리아'가 있던 방향으로 갈기며 폭연을 빠져나가자 눈살을 찌푸린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폭탄들이 우수수 나타난 순간, 아멜리아는 망설임 없이 미래로 도약했다.

'아멜리아'가 주변을 경계하는 가운데, 아멜리아는 사라졌던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나 '아멜리아'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발사된 탄환은 이번에도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답례라는 듯 새로이 나타나 일제히 자신을 겨누는 총구들을 앞에 두고, 아멜리아는…….




+ + + + +




"짜증나네. 집어치워."


'아멜리아'의 말에 아멜리아는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췄다.

'아멜리아'의 총들은 여전히 아멜리아를 겨누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발사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멜리아는 시계의 버튼에 댄 손가락을 긴장시켰다.


"갑자기 뭐야?"

"귀찮으니까 때려치우려고. 언제까지 루프 돌리면서 장난질만 할 거야?"

"흥.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네가 헛수작을 부리니까 그렇지."


자기 자신이 직접 가는 게 아니라, 기억만을 과거로 보내는 능력. 주로 필요할 때 사건 조사에 쓰던 능력이지만, 이번엔 뭔가 꼬일 때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대응을 바꾸는 식으로 썼다.

그러나 아멜리아가 무언가 변화를 줄 때마다 '아멜리아'도 당연히 같은 식으로 대응해버리니 결판이 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씨익 웃더니 자신의 시계에 손을 댔다.


"난 이 상황을 깨도 할 게 넘치지만, 넌 어떨까?"


아멜리아는 '아멜리아'의 행동을 막으려는 듯 총을 쐈지만, '아멜리아'는 방어막을 믿고 그 사격을 완전히 무시한 채 버튼을 눌렀다. 순간 '아멜리아'의 시계를 기점으로 시공간이 요동쳤고, 그 진동은 그대로 세상 끝까지 퍼져나갔다.


"자, 이 시간은 봉쇄했어. 이제 시간 이동은 불가능해."

"……!"


시간선 봉쇄. 아멜리아가 아까 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아멜리아'의 것은 훨씬 길었다. ……이전의 봉쇄로 친구들이 죽기 전의 시간으로 아예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정도로.

그 사실을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아멜리아의 입꼬리는 오히려 위로 올라갔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봉쇄야말로 아멜리아가 처음부터 노리던 거였으니까.


"……한 가지 알아낸 게 있지."

"뭐?"

"그건…… 너 스스로도 시간선 봉쇄를 못 뚫는단 거야!!"


아멜리아는 그렇게 외치며 리볼버를 뽑아들었다. '아멜리아'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탄환이 방어막에 닿은 순간 처음으로 표정이 변했다. 지금껏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끄떡도 없었던 방어막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래도 방심해주길 바란 아멜리아였지만, '아멜리아'는 그 바람과 달리 얼굴을 굳혔다. 동시에 아무 예고도 없이 사방에 깔린 총들이 불을 뿜었다.

하지만 탄환이 아멜리아에게 닿기도 전에, 그녀의 품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나와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다. 안개에 닿은 탄환은 전부 힘을 빼앗긴 듯 뚝 멈추더니 힘없이 떨어졌다.


"그건 도대체 뭐야?"


'아멜리아'가 표정을 구기며 내뱉었지만, 아멜리아는 그것을 무시하고 달렸다. 그리고 쏟아지는 탄환을 피하며 소총을 갈겼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커다란 방패를 꺼내서 막았고, 반대로 아멜리아는 결국 피하지 못한 탄환에 온몸을 꿰뚫렸다.

그래도 그녀의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휘청거리던 몸에서 불길이 치솟은 순간, 마치 그 불이 추진력을 부여하듯 다시 앞으로 튀어나간 것이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품에서 칼리의 조각을 꺼내서는 남은 힘을 전부 방출해 안개를 뿌렸다. 안개가 '아멜리아'의 무기들을 뒤덮자 그 전부가 힘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큭?!"


'아멜리아'는 황급히 무기들을 불러냈고, 아멜리아는 소총을 버리고 다시 리볼버를 뽑았다. 발포는 동시였지만, 아멜리아의 탄환에서 흘러나온 시커먼 힘이 문어 같은 형상을 취하더니 '아멜리아'의 탄환을 전부 집어삼켰다.

'아멜리아'는 시간의 힘으로 아멜리아의 공격을 날려버리곤 혀를 찼다.


"칫, 아까부터 무슨……."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넌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아멜리아는 곧바로 시간 창고를 열고 구라의 삼지창을 불러내어 왼손에 쥐었다.

쥐는 감촉은 낯설었지만, 마치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품속에 넣어둔 구라의 구슬이 창과 공명하며 아멜리아에게 힘을 주었고,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머릿속에 사용법이 떠올랐다. 동시에 손이 반쯤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이 자리에 없는 구라가 함께 휘둘러주는 것처럼.


"남들이 하는 걸 너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아멜리아는 포효하며 힘껏 창을 내질렀다. 창을 따라 생겨난 커다란 상어의 환영이 '아멜리아'를 덮쳤다. '아멜리아'는 시간추방탄으로 상어를 날려버렸지만, 남은 창이 그대로 '아멜리아'의 어깨를 꿰뚫었다.


"으극……?!"


그대로 리볼버를 들이댔지만, '아멜리아'는 작은 방패를 불러내서 아멜리아의 손을 후려쳤다. 그리고 자신의 리볼버로 아멜리아의 왼팔을 쐈다. 맞은 부위를 중심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왼팔이 창째로 뜯겨나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윽…… 아아아아아아!"


아멜리아는 격통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오른손을 움직여 바닥을 쐈다. 탄환이 박힌 곳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나오더니 문어 같은 형상을 그리며 사방을 휘저었다. '아멜리아'는 뒤로 피했지만, 검은 문어에 깃든 시간추방탄의 힘이 '아멜리아'의 무기들을 전부 없애버렸다.


리볼버에 시간추방탄은 앞으로 한 발뿐. 나머지 2발은 강력한 비장의 수단이지만,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을 위해 아껴야 한다. 키아라의 깃털 덕분에 왼팔은 다시 재생되긴 했지만 첫 번째 깃털의 힘이 슬슬 다한 것 같다.

칼리의 조각도 앞으로 하나. 원래는 두 개였지만, 하나는 특수한 형태로 가공해서 방어용으로는 쓸 수 없다.

한편 '아멜리아'는 재생된 왼팔을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너…… 그것들 대체 뭐야? 어디서 그런 이상한 힘을 얻은 건데?"

"흥, 이걸 이상한 힘이라고 부르는 녀석은 절대로 얻을 수 없거든."

"……몰라. 모르겠어. 애초에 잊어버린 게 너무 많아. 하지만……."


'아멜리아'의 눈에 불이 켜졌다. 검고 탁하고 끈적한, 마치 오랜 세월 퇴적되어 썩어버린 듯한 감정이 그 속에서 느껴졌다.


"그걸 보고 있으니…… 엄청 열받는다는 것만은 알겠어!!!"


'아멜리아'는 그렇게 외치며 양팔을 펼쳤다. 마치 지금껏 모아온 모든 무기를 꺼낸 듯 무수한 무기가 허공에 나타나 일제히 아멜리아를 겨눴다.

그것을 본 순간 아멜리아는 망설임 없이 칼리의 힘을 사방에 둘러쳐 방어막을 만들었다. 직후 무시무시한 탄막이 쏟아졌고, 심지어 방어막 바깥에서 폭발까지 마구 일어났다. 칼리의 힘은 그 모든 걸 끄떡없이 막아냈지만, 이렇게나 공격이 쏟아진다면 힘이 다하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칼리의 힘이 지켜주는 동안, 아멜리아는 이나의 총의 힘을 최대한 끌어냈다. 너무 과도한 힘을 한 번에 집중한 탓에 총구에서 힘이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계속 힘을 끌어모으던 아멜리아는 방어막이 힘이 다하기 직전에 팔을 내렸다. 그리고 방어막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땅에다 한 발을 쏘았다.

쿠르르릉 하고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땅에서 거대한 문어 다리들이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주변에 깔린 무기들을 전부 부수거나 시간의 저편으로 날려버렸지만, 그 와중에도 아멜리아가 디디고 선 곳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마치 그곳을 지키려는 것처럼.


"진짜 끈질기네!!"


문어 다리가 사라지자 '아멜리아'는 새로 소총 두 정을 꺼내서 갈겼다. 그에 대항해 아멜리아는 둥근 방패를 불러내 상반신을 지킨 채 앞으로 내달렸다. 다리에 탄환이 스치거나 심지어 직격해서 바닥을 구르기도 했지만, 키아라의 깃털을 믿고 계속 일어나 달렸다.

하지만 '아멜리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리볼버를 열고 남은 탄환을 전부 뽑아내고는 새로 탄환을 채웠다. 그리고 아멜리아의 방패를 쏴서 없애버렸다.

시간선이 봉쇄된 상태에선 도약탄도, 추적탄도 그냥 보통 탄환일 뿐이다. 새로 채운 건 아마 전부 시간추적탄이겠지.

하지만 그 사이에 이미 아멜리아는 '아멜리아'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까불지 마!!"

"너야말로!!"


'아멜리아'는 리볼버로 아멜리아를 겨눴고, 아멜리아는 키아라의 깃털의 힘을 폭주시켰다. 그리고 전신이 재생의 불길에 휩싸인 상태로 달려들어 '아멜리아'의 시계에 왼손을 뻗었다.


"뻔히 보여!"


허공에서 나타난 거대한 검이 그 팔을 잘랐고, 동시에 나타난 창들이 아멜리아의 옆구리와 배에 박혔다. 그러나 재생의 불길이 그 모두를 밀어내고 순식간에 왼팔을 재생시켰다.

아멜리아의 왼손이 시간 창고에서 자동권총을 뽑아든 것과 '아멜리아'가 다시 그 손을 조준한 것은 완전히 동시였다. 그러나 방금 것을 되갚아주려는 듯 이번엔 아멜리아의 대검이 나타났고 '아멜리아'는 황급히 물러섰다. 그 사이 아멜리아는 자동권총을 빠르게 연사했다.

그 권총엔 사전에 시간추방탄을 채워놓았다. 이나의 힘이 부여되지 않은 평범한 시간추방탄이지만, '아멜리아'의 도구들을 없애버리기엔 충분하겠지.


"대체 왜……!"

"넌 평생 몰라도 돼!"


다시 발을 뗐다. 자동권총의 탄환은 순식간에 다 떨어졌지만, 그 대가로 '아멜리아'에게 가는 길이 열렸다. '아멜리아'는 이제 다 떨어진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걸 노리는지 더는 무기를 불러내지 않았다.

다시 서로가 서로의 간격에 든 순간, '아멜리아'는 비어 있던 왼손을 휘둘렀다. 어느샌가 그 손엔 날카로운 컴뱃 나이프가 쥐여 있었다.


"윽?!"


반사적으로 권총을 버린 왼손으로 칼날을 잡았다. 그러나 '아멜리아'가 즉각 그 팔을 쏴서 또다시 팔이 뜯겨나갔다. 그럼에도 아멜리아는 상대의 배를 걷어차고는 재생된 왼손을 내질렀다. 구라의 구슬의 힘이 왼손을 기점으로 강력한 수류를 만들어냈다.

총탄과 수류가 거듭 교차했다. 그러다 수류가 차단하지 못한 한 발이 이번엔 다리를 날렸다. 하지만 수류가 총을 날려버렸고, '아멜리아'가 휘두른 나이프가 옆구리에 스쳤다. 다리와 옆구리를 치유함과 동시에 키아라의 깃털의 힘이 고갈되면서 재생의 불길이 꺼졌다.

'아멜리아'가 미소를 지은 순간, 아멜리아는 리볼버로 상대의 시계를 겨눴다. '아멜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하! 네 힘으로 내 힘을 뚫을……."


다 들을 가치가 없다. 그런 생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아멜리아의 타임머신 시계는 그 자체로 강력한 시간 방어막에 보호받고 있다. 힘이 더 강력한 '아멜리아'의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래서 '아멜리아'도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고, 아멜리아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방어막을 뚫을 비장의 수를 고민했다.


"수 있다고…… 뭐?!"


탄환은 시계에 닿지 못했다. 하지만 방어막에 닿자 순간적으로 시계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시계를 감싼 강력한 힘이 마치 전원이 끊어진 듯 사라졌다.

친구들에게서 회수한 칼리의 조각 중 하나를 가공한 탄환. 오직 단 한 번의 공격에 칼리의 힘을 응축해, 설령 '아멜리아'의 힘이라 해도 잠깐은 없앨 수 있다.

원리는 몰라도 현상을 이해한 '아멜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이게!"


당황한 '아멜리아'는 나이프를 휘두르는 한편 반대쪽 손을 시계에 가져갔다. 그에 대항해 아멜리아는 상대의 어깨 쪽으로 수류를 날렸다. 아까 구라의 창에 찔렸던 그곳을.


"끄윽?!"


상처가 찢어지며 비명과 함께 핏물이 치솟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도 궤도가 틀어진 나이프가 목덜미에 스쳐 상처를 입었다.

그 때 이미 아멜리아의 리볼버는 상대의 시계를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안……!"


'아멜리아'도 상황을 깨닫고 황급히 나이프를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타아앙!!




리볼버에 장전된 마지막 탄환이 시계에 명중했다.

시계는 방어막이 무력화되었음에도 안에 깃든 힘으로 저항했지만, 아멜리아의 탄환은 그 이상의 힘으로 저항을 찍어눌렀다. 공간이 격렬하게 뒤틀리고 풍경이 일그러졌다.

그 탄환은 시간추방탄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놈은 아니었다. 시간의 감시자에게 받은 힘을, 칼리의 조각을 가공하는 데에 쓴 분량만 빼고 전부 때려넣은 극한의 추방탄이었다. 그야말로 어떤 힘을 지닌 놈이라 해도 시간의 끝으로 쫓아낼 수 있을 정도로.


경합은 잠시뿐, 결말은 금방 났다. 탄환의 힘을 이기지 못한 시계는 그대로 시간의 틈새로 사라졌고, 뒤틀려가던 시공간을 넘어 시계를 붙잡으려 했던 '아멜리아'의 손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아멜리아'가 지닌 시간의 힘의 근원이, 사라졌다.


"……끝났어."


아멜리아는 즉각 새로운 권총을 꺼내 '아멜리아'의 이마에 들이댔다. 허튼 짓을 하면 바로 쏴버리겠다는 뜻을 눈빛에 담아낸 채로. 반면 '아멜리아'는 자신의 회중시계가 사라진 순간 얌전해졌다. 마치 모든 것이 끝난 걸 받아들인 것처럼.


"마지막으로 묻겠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왜…… 그 애들을 죽인 거야?"

"……글쎄."


맥 빠지는 대답에 아멜리아는 무심코 손에 힘을 넣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 분위기를 읽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건지,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기억도 안 나. 왜 시작한 건지, 언제부터 해온 건지……. 그냥 미웠어. 웃고 있는 꼴들이 보기가 싫었어."

"아, 그래. 유언은 그걸로 끝이야?"

"흥. ……아아, 그러고 보니 하나 생각이 났네."


아멜리아는 혹시라도 '아멜리아'가 총이나 시계를 빼앗으려 들까 싶어서 긴장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잠시 이전처럼 돌아간 듯 입을 움직여 비웃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이 아멜리아의 목덜미를 보았다. 아까 나이프가 스쳐서 아직 피를 흘리는 그곳을.


"내가 언제 끝날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모래시계에 갇혀버린 불쌍한 바보한테 말이야."

"아, 그래."


아멜리아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곤 방아쇠를 당겼다.

저항도, 이변도 없었다. 맥없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은 지금까지의 사투가 뭐였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허무했다.

그래도 아멜리아는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겼다. 원래라면 도저히 역부족이었을 상대에게. 하지만 만족감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있는 건 그저 함께 축배를 들어야 할 친구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무정한 사실뿐. 그것을 생각하자 지금껏 제대로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이제야 흘러넘쳤다.

참아야 한다고, 견뎌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오열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아아아아아아아……."


이기면 뭐하는가. 복수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잃어버렸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데. 더 이상 함께 노는 것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할 수 없는데.

만약 사후세계라는 게 있다고 믿었더라면, 먼저 간 친구들을 따라가는 게 차라리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 + + +




그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만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멜리아는 이젠 더 나올 눈물조차 없어서 말라버린 눈을 문득 들었다.

희망은 여전히 없다. '아멜리아'가 과거에 걸어놓은 시간선 봉쇄를 뚫는 것은 지금도 불가능하고, 죽은 자를 되살릴 방법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목소리를 듣는 것도, 얼굴을 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멜리아는 회중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시계에서 빛의 입자가 흘러나오더니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홀로그램 모니터 같은 형상을 빚어냈다.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친구들의 모습이었다.

행복하게 웃는 모습. 장난을 치다 다투는 모습. 매운 걸 먹고 괴로워하는 모습. 우는 모습과 위로하는 모습.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는 모습…….

이 시간선에서는 이미 영원히 사라져버린 모습들이,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렇구나."


무심결에 입술이 움직였다. 기나긴 오열로 갈라질 대로 갈라져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도 않게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입을 움직이는 것은 순전히 충동 때문이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내가 해냈다고 세뇌하듯이.


"지킨 거야."


이 우주엔 수많은 시간선이 있고, 그 모두는 각자의 생을 살아간다.

이 시간선에서는 비극이 있었지만, 다른 시간선에선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멜리아'에겐 그 시간선 모두를 침공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을 죽여왔겠지.

여기서 막지 못했다면, 다른 시간선의 친구들마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미소가 떠올랐다.


"내 친구들은 죽었지만…… 다른 시간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어."


그러면 됐다.

이 시간선의 친구들은 지키지 못했지만, 다른 수많은 시간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곳에서 친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이렇게 살아서 지켜볼 수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 되뇌이고서야 겨우, 아멜리아는 고장난 것처럼 힘이 빠진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 + + + +




그날 이후, 아멜리아는 어떻게든 일상으로 돌아왔다.

물론 기존의 일상과는 달랐다. 시간선을 넘나드는 일이 전보다 많았고, 남을 위협하는 놈들과 직접 충돌하는 일도 늘었다.

그렇게 바빠진 와중에도 다른 시간선의 친구들을 지켜보는 것은 잊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웃고 있는 다른 시간선의 자신을 볼 때마다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행복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삐걱거리는 감정 따위, 없다고 무시했다.

나는 행복하다. 친구들을 지켰으니까. 그것도 하나의 시간선만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선에 존재하는 친구들과 자신을 위협에서 구해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로 인해 여전히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그들을 볼 수 있다면 충분히 값지다.

하지만 조금씩 가슴을 찔러오는 생각이 있었다. 필사적으로 억눌렀지만, 행복하게 웃는 다른 시간선의 자신을 볼 때마다 조금씩 흔들림이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흔들림에서 한 의문이 솟아올랐다.







──왜 나만 모두 잃어야 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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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를 제대로 못해서 중간중간 문장이 개판일 수도 있음

원래 초기 구상은 여기서 끝나는 단편이었는데 쓰는 도중에 후속작 소재가 생각나서 대회 끝난 후에 뒷편 올릴거임

근데 내 개인적인 일도 해야 해서 언제 올릴지는 나도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