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여기 올렸던 자작 퍼즈페달 PCB 디자인을 다 끝마쳤다는 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음


퍼즈 페달 하나 커스텀으로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는 댓글이었는데


일단 내가 페달을 자작해본게 몇개 되지 않아 (심지어 그 중 절반 이상은 페달파츠 부품팩 단순 조립이었음) 스스로의 실력에 의구심이 있기도 했고


전파법이라는 대한민국 희대의 악법 탓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음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거 관련해서 정보글을 하나 써보면 좋겠더라고



사실 법령이란게 우리같은 일반인들에게는 쉽게 와닿는 내용도 아닐뿐더러


개인이 회로도를 읽고 직접 부품들 조립해다가 전자기기를 만드는 경우도 과거에 비해서는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줄어들었기에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평생 모르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내용이지만


나처럼 DIY 같은 거 좋아하는 사람들, 심지어 후술하겠지만 과거엔 해외직구족들에게도 꽤나 심각한 문제였기에 한번 소개해볼까 함


시작.


1. 전파법이란?

법령 열람 사이트 '전파법' 페이지: https://www.law.go.kr/%EB%B2%95%EB%A0%B9/%EC%A0%84%ED%8C%8C%EB%B2%95


그 법이 무엇을 위해 제정된 법인지는 법률의 서두에 있는 제 1조 '목적'을 보면 알 수 있음.


그리고 전파법의 제 1조에는 '이 법은 전파의 효율적이고 안전한 이용 및 관리에 관한 사항을 정하여 전파이용과 전파에 관한 기술의 개발을 촉진함으로써 전파 관련 분야의 진흥과 공공복리의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라고 적혀있음.


그냥 정말정말 러프하고 쉽게 압축해서 말하면 전자기기를 안전하게,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든 문항들을 저 항목에 묶어다 짬처리 해놓은거라 보면 됨.


법의 목적으로만 보면 당연하게도 나라에 꼭 필요한 내용으로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누군가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했던가, 마찬가지로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법률이나 국민 정서, 국가 상황에 맞지 않는 소위 악법은 역으로 만인에게 '평등하게' 피해를 주기도 함.


그리고 내가 오늘 소개할 내용도 전파법의 하위에 들어있는 이 악법 조항에 대해서임.


2. 그래서 이게 왜 악법임?

두괄식으로 요약하자면 이 법이 악법인 이유는 이 법의 제58조의2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음.

제58조의2(방송통신기자재등의 적합성평가) ① 방송통신기자재와 전자파장해를 주거나 전자파로부터 영향을 받는 기자재(이하 “방송통신기자재등”이라 한다)를 제조 또는 판매하거나 수입하려는 자는 해당 기자재에 대하여 다음 각 호의 기준(이하 “적합성평가기준”이라 한다)에 따라 제2항에 따른 적합인증, 제3항 및 제4항에 따른 적합등록 또는 제7항에 따른 잠정인증(이하 “적합성평가”라 한다)을 받아야 한다. 


즉 대한민국 내에서 어떠한 전자기기를 제조하고 판매하려면 저 58조 2항에 의거, 소위 말하는 적합성평가를 받아야만 함.


제82조(벌칙)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제19조제1항에 따른 허가를 받지 아니하거나 제19조의2제1항에 따른 신고를 하지 아니하고 같은 항 제3호 및 제4호의 무선국을 개설하거나 운용한 자

1의2. 제29조제5항에 따른 인가를 받지 아니하고 전파차단장치를 제조ㆍ수입 또는 판매한 자

2. 제41조제3항에 따른 승인을 받지 아니하고 위성주파수이용권의 전부 또는 일부를 양도ㆍ양수 또는 임대ㆍ임차하거나 위성주파수등의 이용을 중단한 자

3. 제42조의2제1항에 따른 승인을 받지 아니하고 우주국 무선설비의 전부나 일부를 양도ㆍ양수하거나 임대ㆍ임차(무선설비를 위탁운용하거나 다른 자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포함한다)한 자

4. 제58조제1항에 따른 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같은 항 제2호에 따른 통신설비를 설치하거나 운용한 자

5. 제58조의2제2항, 제3항 및 제9항에 따른 적합성평가를 받지 아니한 기자재를 판매하거나 판매할 목적으로 제조ㆍ수입한 자

6. 제58조의10제1항을 위반하여 적합성평가를 받은 기자재를 복제ㆍ개조 또는 변조한 자


문제는 이게 권장이나 권유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전파법 82조에 의거, 법적인 구속력이 존재하는 조항이라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전파법에서 인정하는 인증단체에서 인증을 받지 못한 전자기기는 판매 자체가 불가능하고, 만약 인증 없이 저걸 제조, 판매하다가 껀수 노리던 신고자나 김 형사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최대 3년 이하의 쇠고랑을 차거나 3,000만원 이하에 달하는 벌금을 물 수도 있음.


그럼 이 병신같은 악법이 낳은 네 가지 실제 피해 사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2-1. 제품의 개발/생산비 증가와 그로 인한 소비자가의 상승

저 법에서 말하는 내용은 전자기기를 국내에서 제조, 판매하려면 공인된 인증 기관에서 적합성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임. 그리고 대한민국 내에서 정식으로 판매되는 전자기기들은 대략 99.9%가 이 인증제도를 통해 적합성평가를 모두 마친 뒤에 판매됨.



전파법에서 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증 마크로는 전자기기 박스나 메뉴얼에서 봤을지도 모르겠는 이 KC 인증이 있음.


문제는 당연하겠지만 저게 국가에서 운영하는 인증제도라 해도 모든 과정을 다 공짜로 해주는 것이 아님.


제품을 개발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든 뒤 또 돈과 시간을 써서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이 KC 인증으로 인해 제품 디자인과 개발에 더욱 많은 시간과 돈을 사용해야 되고, 이는 그대로 개발비, 그리고 소비자가의 상승으로 이어짐.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국가에서 강제한 인증제도로 인해 발생된 기업의 금전적 부담을 온전히 그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떠앉아야 한다는 것임.


심지어 약간 다른 얘기긴 하지만 저게 다른 나라 기관에서 진행된 테스트는 또 인정을 안해줘서 일종의 제도적 무역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음. 즉 다른 나라 기업들도 한국에서 자기들 제품을 파려면 한국까지 기어들어와서 KC인증을 또 따로 진행해야 된다는 거지. 당연히 여기에 들어가는 부담도 소비자가 지게 되는 상황임.


2-2. 대한민국 내국인의 해외직구 전자기기 사용을 사실상 차단 (사실상 해결)

이건 요즘보다는 과거에 논란이 많았던 내용인데, 과거 전파법에서는 아예 해외직구로 전자기기를 구입해온다면 무조건 적합성 평가를 받아야만 정식으로 들여올 수 있다는 미친 조항이 있었음.


즉 당시엔 너가 이베이나 타오바오에서 맘에 드는 전자기기가 생겼고, 이걸 구매하고싶다면 국내 인증기관에 무조건 이 제품의 적합성 평가를 받았어야만 했다는 거임.


근데 문제가 이게 서류 한두장만 제출하면 허가 땅땅이 아니라 그 기기의 회로도, 적합성 평가에 사용될 제품 본체, 메뉴얼 등등 오만가지 서류들에 더해 대당 몇십만원이나 되는 인증 수수료까지 필요해서 사실상 개인 소비자 입장에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미친 관문이었다는 거.


심지어 저걸 들여올 때마다 무슨 도검류나 엽총류 신고하듯 한대 한대 모두 각각 적합성 평가와 인증을 받았어야 했다.


예를 들어 만약 저 당시에 요새처럼 애플 전자기기 풀세트를 직구로 맞춘다 한다면 아이폰 + 맥북 + 아이패드 + 애플워치 + 에어팟 이걸 따로따로 각각 인증을 받았어야만 했다는거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음?


참고로 이게 개정된 이유가 2010년에 정치권의 모 높으신 분이 방송 브리핑에서 직구한 애플 아이패드를 들고나온게 논란이 되면서부터였음. 국민들은 저 인증제도에 가로막혀 국내에서는 사실상 사용할 엄두조차 못하는 기기를 정치권의 높으신 분은 태연히 방송에 나와서 쓰고있으니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논란이 됐던거지.


저 사건 이후로 해외직구로 구입한 전자기기는 개인이 사용할 목적으로 1대만 들여온다는 전제 하에 인증이 면제되었고, 이 제도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음.


2-3. 해외직구로 들여온 전자기기의 중고거래 차단과 전과자 양산 문제

위와 연계되는 내용인데, 위 아이패드 사건 이후로 해외 직구에서 들여온 전자기기는 개인사용, 1대 한정으로 인증이 면제되었다고 했지?


근데 그렇게 국내 반입한 제품을 '판매'하는 경우엔 여전히 인증을 받아야 하고, 이걸 위반했다가 경찰서에서 조사받으로 나오라는 문자를 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님


당장 내가 들은것만 해도 2010년대 중후반쯤 한창 드론같은거 유행하던 때에 사람들 사이에서 중국 쇼핑몰에서 직구한 드론을 중고거래하다가 단체로 쇠고랑 찰 뻔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음.


물론 대부분은 훈방조치 되지만, 간혹 운이 나쁘면 정말 처벌을 받고 인생에 빨간줄이 그이는 사람들도 있긴 했을거고, 아예 경찰에서 이걸 포상신고제로 운영하면서 (지금도 그렇지만) 중고거래 사이트 등지에서 이걸로 포상금 슈킹을 하는 인간들도 있었음.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평생 몰라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그런 법 하나 무심코 위반했다고 전과자가 되어버리니 진짜 이 법이 전과자 양산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던거지.



2-4. 법인이 아닌 개인의 전자기기 제조, 판매 활동의 어려움

사실상 오늘의 메인 내용. 여전히 국가에서 인정해주는 KC인증같은 제도는 개인이 이용하기엔 절차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어려움이 있는데다 그 과정도 되게 복잡하기 때문에 개인이 본인이 자작한 전자기기를 인증받고 실제 적법하게 판매하는건 대단히 험난한 산을 여럿 넘어야 함.


미국의 JHS나 킬리처럼 취미나 용돈벌이로 이펙터 모디해주던 사람들이 입소문타다가 아예 회사를 차리고 성공한다는 스토리? 한국에서는 저 전파법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임.


간혹 뮬에서 이펙터 돈받고 모디해준다거나 자작 이펙터 처분한다고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거 현행법상으로는 전부 전파법 위반임.



기타 이펙터, 앰프 자작하는걸로 유명한 유튜버 공돌이파파의 영상인데, 위 영상 2분 47초에도 원래 본인의 꿈이 기타 앰프를 자작하여 판매하는 것이었음에도 인증제도에 막혀 실패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 이런 내막이 있었던 것.



3. 개정안은 없음?

2024년 1월 23일에 개정되었고, 동년 7월 23일부터 시행되는 전파법 개정안(사진 오른쪽 파란 글씨)에 따르면


새 개정안 발효 이후로는 꼭 국가에서 인정하는 인증기관에 가지 않더라도 제조자 스스로가 자신이 제작한 기자재를 시험하고 적합성 평가 기준에 맞는지를 자율적으로 판단, 공개하는 제도(자기적합확인제도)를 시행하려는 모양임.


내가 법을 아주 잘 아는 편이 아니라 저게 그냥 생색만 내는 개정안인지, 아니면 정말로 인증제도 원툴로만 운용하던 전파법에 혁신을 가하려는 개정안인지까진 단언할 수 없으나,


그래도 개정 이후엔 굳이 KC 인증 없이도 개인이 만든 이펙터나 앰프같은걸 많이 볼 수 있길 바랄 뿐임.



세줄요약

1. 국내에서 전자기기를 제조, 판매하려면 무조건 법령에서 인정해주는 인증기관에 분석을 의뢰하여 적합성 인증을 받아야 한다.


2. 즉 개인이 직접 만든 전자기기, 가령 기타 이펙터나 앰프같은걸 KC 인증없이 제조, 판매하는 순간 전파법 위반으로 쇠고랑을 찰 수 있으며, 최대 3년의 징역형, 최대 3,000만원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3. 그나마 이번해 7월 23일부터 시행되는 개정안에서는 자율적합성확인제 비슷하게 법이 바뀌어서 위와 같은 사태가 하염없이 계속되진 않을거같음.



오늘 잠 4시간밖에 못자서 글이 좀 두서없고 구성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음.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