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genshin/101293212?category=%EC%B0%BD%EC%9E%91&p=1 - 이전화


여행자는 천천히 폰타인 성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폰타인 성 내부는 언제나 그렇듯 나른한 공기로 평온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몇십 분 뒤면 이 성 내부도 선혈이 낭자 하는 폐허가 되겠지.

 

이전 같았으면 여행자는 모두를 살리려고 시간을 되돌릴 각오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기회가 더 이상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포기해서인지, 아니면 미래를 알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근심과 걱정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쯤인가.”

 

“똑, 똑, 똑”

 

여행자는 폰타인 성 내부에 있는 한 집의 문을 경쾌하게 세 번 두들겼다.

 

“하암-. 누가 우리 집 문을…. 여, 여행자? 여긴 무슨 일로-”

 

“안녕, 푸리나. 잘 지냈어?”

 

여행자는 푸리나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푸리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이 당황스러운 눈치였지만,

이내 다시 현관문을 닫고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다시 열었다.

 

“여행자,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올 줄 알았으면, 차라도 대접하는 건데….”

 

푸리나는 여느때와같이 활기차게 여행자를 맞이해줬다.

여행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 잠깐 울컥했지만,

이내 감정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흐흠, 별건 아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져왔는데, 한번 들어볼래?”

 

“오~ 무슨 이야기이려나? 

이 슈퍼스타님을 만족시킬만한 이야기라면, 참신하고 재밌는 이야기여야 할 텐데?”

 

“아하하-”

 

그래. 나는 이런 걸 원해서 시간을 되돌리고 있었구나.

 

여행자는 그녀와 이야기하며 문득 즐거움에 대해 깨달았다.

 

왜 내가 그녀를 살리고 싶었을까.

왜 내가 그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계속되는 시간의 흐름에 묻혀 기억하지 못했던 이야기.

 

여행자는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점점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분명 늦었는데.

분명 그녀를 더 이상 구할 수 없을 텐데.

 

미련이 남았던 건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마음 확인이었을까.

 

또다시 감정이 북받쳤다. 여행자는 밀려 나오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옛날에 한 기사가 있었대. 공주님을 구하려고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고 해.”

 

“흥, 어디선가 본 이야기네. 일단, 계속 이야기 해봐.”

 

“도입부는 다 비슷하니까. 자 그럼 다음엔-”

 

여행자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녀는 여행자의 이야기에 놀랄 때도 있었고, 즐거워할 때도 있었다.

 

여행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

슬퍼할 때는 눈물을 흘릴 줄도 아는 그녀의 모습.

 

여행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길었더라면, 아니, 영원했다면 행복할 수 있었을까.

 

어느덧 이야기는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다.

 

여행자는 점점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렇게 공주를 구하기 위해, 공주를 죽여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온 거야.”

 

“어떻게 그런….”

 

“하지만 기사는 포기하지 않았지.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려고 애를 썼어.

...그러나 결국 공주를 구하지 못했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랬구나.”

 

푸리나는 어느새 잔뜩 슬픈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그렇게 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시간을 되돌리기 전, 여행자와 푸리나의 이야기였다.

 

“여행자, 이 이야기의 제목은 뭐야? 폰타인 서점에서도 못 봤던 것 같은데.”

 

“그건-”

 

갑작스레 푸리나의 질문이 들어왔다. 

여행자는 이 이야기의…. 제목을 따로 정해두지는 않았다.

 

푸리나는 어느새 여행자의 곁에 다가와 반짝이는 눈으로 여행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목을 기대하는듯한 그녀의 눈빛은, 

여행자가 보아왔던 그녀의 그 어떤 모습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두근-’

 

...심장 소리일까, 아니면 아직 남아있는 그녀의 ‘힘’에서 나오는 고동일까.

 

여행자는 조금 전의 고동으로 운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중에 알려줄게.”

 

“엥? 이런 게 어딨어! 실컷 재미있게 이야기해놓고, 제목은 나중에 알려준다니!”

 

여행자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현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푸리나는 그런 여행자의 태도가 장난스럽다고 느꼈지만, 여행자는 그렇지 않았다.

 

여행자는 문득 청년이 자신에게 전해주었던 

‘죽어버린 신의 눈’이 자신의 주머니에 아직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여행자는 빠르게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주머니의 끝에서 차가운 쇳덩이 하나가 만져지는 것을 느꼈다.

 

...잠깐, 재료 중 ‘시간’의 의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리나. 아무래도….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

 

“뭐야! 그럼 완결도 안 난 이야기를 나한테 말해준 거야? 난 그런 거 딱 질색이라구!”

 

여행자는 새침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볼멘소리를 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다운 그녀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여행자가 지키고 싶어 했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럼, 네가 결말을 정해줄래?”


“어…. 어? 그건 원작자에 대한 실례잖아! 

작품이란 건, 음…. 잘 만든 디저트 같은 거니까.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거야.”

 

디저트라.

푸리나다운 발상이었다.

 

여행자는 그녀의 대답에 그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미소는 하나의 위태롭지만 굳건한 촛불처럼, 여행자의 마음에 불을 밝혔다.

 

“괜찮아.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잖아. 너라면…. 결말을 어떻게 내고 싶어?”

 

여행자의 질문에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공연할 때 말고는 본적이 없는 표정이었는데, 눈앞에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느꼈다.

 

푸리나는 그렇게 끙끙대며 이마를 짚다가, 턱에 손을 올리다가, 겨우겨우 말을 내뱉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여행자는 푸리나의 대답에 다시 한번 그녀를 뒤돌아 바라보았다.

 

푸리나는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여행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면, 해피엔딩으로 끝낼 것 같아.”

 

“...그렇구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포기하지 말아야겠지.

 

“그렇게 만들어볼게.”

 

“...어?”

 

여행자는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을 박차고 오똔산 중턱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분명 이 시간이라면, 아직 ‘그’가 있을 시간이다.

 

“여행자! 잠깐-!”

 

순식간에 밖으로 달려나간 여행자의 뒷모습을 본 푸리나는,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를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행자는 방금전의 대화로 이전에 스스로 약속했던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구해야겠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청년이 건네준 이 ‘신의 눈’에서, 희망을 보게 되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수 없다.

인정하기 싫지만 청년의 대답은 틀린적이 없다.

 

...그러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남은 게 없지 않은가.

 

여행자는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희생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미소를….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후회를 하고 그만두어도 될 일일지도 모른다.

 

“...맞아. 애초에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을 테니까.”

 

...진심을 깨닫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

.

.

 

여행자는 청년이 건네준 별을 만지작거리며 엔죠가 있던 산 중턱에 도착했다.

 

있는 힘껏 뛰어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평소보다 가벼운 기분이었다.

 

여행자는 그렇게 엔죠가 서있던 산 중턱을 기웃거리다, 책을 읽고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엔…. 죠, 오랜만이야.”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여행자는 당황스러워하는 엔죠의 표정을 바라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질문했다.

 

“운명의 베틀, 지금 사용할 수 있을까?”

 

“...뭐?”

 

.

.

.

 

“...제정신이 아니군. 암만 ‘이론’이라곤 하지만, 이런 게 될 리가 있다고 생각하나?”

 

엔죠는 여행자의 대답에 노발대발하며 여행자를 말리려 했지만,

여행자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야. 날 희생해서라도…. 그녀를 살리고 싶어.”

 

“하아….”

 

엔죠는 막무가내의 여행자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갑자기 와서 운명의 베틀을 쓴다고 한다는 꼴이 정말…. 가관이었다.

 

“미미한 이론으로도 모자라,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에 목숨을 바친다고?”

 

“그 정도로 나에겐 중요한 일이야.”

 

엔죠는 여행자의 대답과 태도, 모든 것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여행자가 운명의 베틀의 존재를 알고, 

사용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낼 정도라면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마침 널 도와줄 만한 사람이 하나 있거든.

그리고…. ‘운명의 베틀’을 가동하는 것도, 흔하게 볼 기회도 아니고 말이야.”

 

“도와줄…. 사람? 네가?”

 

“너무 의심하는 것도 좋은 습관은 아니야.”

 

티격태격하는 여행자와 엔죠의 앞엔 

누더기 한 벌 옷을 입고 있는 한….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걸어 나왔다.

 

“소개하지, ‘재단사’야.”

 

“‘재단사’라….”

 

여행자는 ‘재단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

후드가 끝까지 내려와 입술 말고는 보이지 않는 얼굴.

 

여행자는 그녀의 모습에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 낯설지 않은데. 누구지?’

 

“...안녕.”

 

‘재단사’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굉장히…. 얇았다.

 

“네 허튼짓을 도와줄 사람이다.”

 

“...뭘 도와준단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고마워.”

 

여행자는 엔죠의 대답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재단사를 더 자세히 바라보았지만,

처음 느꼈던 단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익숙한 느낌은…. 여행자를 그립게 만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엔죠, 기계를 사용해도 될까?”

 

여행자는 기묘한 느낌을 억누르고 엔죠에게 말했다.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 수어 분만 지나도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궁금증은 나중에 해결하면 된다. 지금 중요한 건…. 재단사의 정체가 아니었다.

 

“네가 그렇게 부탁을 구하는 성격은 아닐 텐데.”

 

“...동의한다고 생각할게, 고마워.”

 

여행자는 운명의 베틀로 걸어가는 와중에도 재단사가 신경 쓰였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이 느낌, 이 위화감.

 

바로 앞에 있는데도 알 수 없는 이 감각.

 

여행자는 궁금증을 겨우 참아가며 운명의 베틀 앞에 놓인 수많은 태엽 중, 

큰 태엽 세 개를 돌려 받침대 세 개를 자신의 눈앞에 놓았다.

 

‘드르륵-’

 

돌끼리 긁히는 소리가 났다. 묵직한 진동이 여행자의 온몸으로 전해졌다.

 

여행자는 눈앞에 놓인 석재로 된 받침대 세 개를 바라보며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가지고 온 재료들부터 넣어볼까.”

 

여행자는 자신이 준비한 재료를 차례로 넣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 재료.

 

‘운명을 담을 별’

이것은 청년의 도움으로 겨우 구했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자는 별들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청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놈은…. 말없이 목을 그을 때부터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었다.

 

...항상 최악의 결과였던 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두 번째 재료.

 

청년이 건네준…. 푸리나의 ‘죽어버린 신의 눈’

여행자는 이 신의 눈을 ‘시간’이라고 해석했다.

 

꺼져버린 신의 눈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여행자는, 이나즈마와 다른 국가를 여행하며 그 ‘표본’들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빛이 없더라도, 염원은 남아있지 않을까.’

 

염원은 기억 속에서 발현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살고 싶다’라는 공통적인 염원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생존’의 염원을 제외한 모든 염원은, 경험과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경험과 환경의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바로 ‘기억’.

 

그리고 기억은….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가설에 불과했지만, 

여행자에겐 시간도, 기회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물론….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재료.

 

‘생명’

 

여행자는 생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참을 고뇌했다.

 

보통 생명이 뜻하는 것은 삶을 의미했다. 

하지만 삶을…. 재료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여행자는 죽음으로 초점을 맞춰 해답을 도출했다.

 

여행자의 답은…. ‘희생’이었다.

 

“...내가 없는 세계에서도, 그녀가 잘 지낸다면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면, 미리 가동을 해봤을 텐데.

 

그녀는 아직 살아있다. 이렇게 된다면, ‘그릇’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에 이 운명의 베틀로 그녀의 운명을 다시 짠다면, 그녀의 삶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여행자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레버를 올렸다.

이전에 엔죠가 큰 레버를 당겨 기계를 멈췄던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반대로 올리면 당연히-

 

“쿵-!”

 

큰소리와 함께 운명의 베틀이 천천히 돌아갔다. 

주변의 톱니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점점 큰 소음을 내고 있었다.

 

“작동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가르쳐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아니, 이전에 네가 하는 걸 봐서 알고 있거든.”

 

“그건 무슨-”

 

“...농담이야. 그냥 딱 봐도 이렇게 쓰는 것 같더라고.”

 

...그에게 내가 시간을 돌렸단 사실을 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방심해선 안 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니까.

 

여행자는 레버를 당기고 난 후, 

이다음 어떻게 장치를 작동해야 하는지 몰라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엔죠, 이다음은 어떻게 해야 해?”

 

“-그건 내가 알려주도록 하지.”

 

“우왓- 깜짝아, 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는 거야….”

 

엔죠를 찾던 여행자의 앞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재단사’였다.

 

재단사는 깜짝 놀란 여행자의 얼굴을 보며 “훗-”하고 짧게 웃다가,

운명의 베틀의 조작법을 천천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다음은…. 그래, 그 태엽을 돌리면 첫 번째 재료가 장치 안으로 들어갈 거야.”

 

“그다음은?”

 

여행자는 재단사의 지시에 순조롭게 운명의 베틀을 작동시켰다.

 

‘그르륵-’

 

돌끼리 긁히는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어느새 재료를 담은 두 개의 받침대는 장치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 장치는, 대체 뭘 넣어야 하는 거지?

 

‘분명 장치 안으로 직접 들어가야 하는데, 

“희생”이라고 한들, 직접 들어가 버리게 된다면 장치를 조작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음…. 이 마지막 세 번째는, ‘나’를 재료로 쓰고 싶은데.”

 

“진심이야? 그러면, 일단 잘 들어가게 몸을 잘라서-”

 

“...농담이지?”

 

여행자의 대답에 재단사는 “하하하-”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몸짓으로 봐선…. 아무래도 장난인 듯했다.

 

“장난칠 시간이 없어.”

 

“미안,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니까 너무 즐거워서.”

 

“...‘오랜만에’?”

 

여행자의 질문에 재단사는 그만 아차- 하더니, 이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 그러니까, 오랜만에 사람이랑 대화해서 그런 거야.

응, 맞아! 저 마물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사람이 아닌 게 실감이 난다니까?”

 

“가장 먼저 날 찾아와서 눈물 콧물 다 흘리던 넌 어디로 간 거지?”

 

“아잇…. 그런 건 말 안 해도 되는데….”

 

여행자는 그녀의 대답이 수상하다고 느꼈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투이기도 했고, 친근하기도 했지만, 목소리가 사뭇 달랐다.

 

‘...아니야, 설마 그럴 리는 없어.’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분명 아닐 것이다. 그녀라고 하기엔 조금 다르다.

 

여행자는 밀려오는 의심을 강제로 거두고 다시 재단사에게 질문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그냥 손바닥을 올려서 장치와 맞닿으면 될 거야. 굳이 장치 속으로 손을 집어넣을 필요는 없어.”

 

“...알겠어.”

 

여행자는 그녀의 대답에 세 번째 받침대 위로 자신의 오른손을 올렸다.

 

“...이제, 레버를 당기면 돼.”

 

여행자는 재단사의 대답에 자신의 눈앞에 있는 가장 큰 쇠로 된 막대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드르륵-’

 

경쾌한 소리가 장치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오히려 장치는 작동을 시작하고 나서 훨씬 조용해졌다.

 

매끄러운 선율을 연주하는 하나의 지휘자처럼,

그리고 부드러운 노랫소리처럼.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는 조용히 끼릭거리는 소리만 반복되고 있었다.

 

“...아-”

 

여행자는 순식간에 자신의 힘이 몸에서 점점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장치는 여행자의 ‘생명’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아직 이야기의 결말을 다 짓지 못했는데.’

 

여행자의 눈앞에 붉은빛의 별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아마 청년이 준 그 여섯 개의 별들일 것이다.

 

별들은 붉은빛의 파동을 내뿜으며 공중을 떠돌다, 

두 번째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던 ‘신의 눈’과 천천히 공명하기 시작했다.

 

신의 눈은 붉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물 원소를 담았던 그릇과는 다르게, 불 원소도 아닌 더 밝은 빛으로 빛나는 신의 눈은, 

이윽고 공중에서 점점 커지는 파동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거 제대로 되는 거, 맞지? 암만 봐도 붉은색만 잔뜩 보이는데.”

 

“이래 봬도 성공한 적은 있다. 너도 알지 않나? 클로타르 말이다.”

 

“...그래, 아주 잘 알지. 윽-!”

 

여행자는 점점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빨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폰타인의 운명을 위해서라도-

 

‘띵-!’

 

여행자의 간절한 염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원래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어느새 여행자의 눈앞에 정렬된 신의 눈과 별들은 푸른빛으로 빛나며,

주인의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 되는것같-”

 

여행자는 슬슬 자신의 몸이 한계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눈앞에서 제대로 연결되어가는 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된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그녀는 잘살아갈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이겠지. 그녀라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거다.

 

분명 그럴 것-

 

여행자가 거의 의식을 잃을 때쯤이었다.

여행자의 오른손 위로 누군가의 손이 포개어졌다. 

 

올려진 손은 따뜻했다. 

여행자는 잡아본 손들 중에서 지금 올려진 이 손이 가장 상냥할 것이라고 느꼈다.

 

여행자는 다시 밝아져 오는 시야를 들어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오른손 위에는…. 재단사의 왼손이 올려져 있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이제야 만났는데, 다시 작별하게 됐네.”

 

푸른빛의 힘이 여행자의 손 위에서 맥동했다.

힘은 파동을 만들어냈다. 파동은 재단사의 후드를 잡고 흔들었다. 파동은 재단사의 후드를-

 

“...푸리나?”

 

여행자의 눈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푸리나 본인이었다.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를 눈물 자국도, 그녀의 뺨 아래로 짙게 내려있었다.

 

“여행자, 속여서 미안해. 나도 시간이…. 필요했었어.”

 

“그게 무슨-”

 

그때 여행자의 머릿속에 한가지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 속 깊은 곳에서, 그리고…. 꿈속에서 들었던 그 문장.

[여행자. 시간을 되돌리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언제부터 이렇게 꼬이게 된 걸까?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부터?

아니면, 그녀가 ‘힘’의 그릇이 되었을 때부터?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내 눈앞에 이렇게 살아있다.

 

여행자는 어느새 자신의 눈으로부터 쏟아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흐르는 듯했다.

 

푸리나는 여행자의 표정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여행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널…. 너무 보고 싶었어.”

 

푸리나는 여행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순간부터 얼마나 많은 과거를 반복했을까.

 

만약 여행자와 같은 ‘시계의 법칙’을 따랐다면, 

그녀는 여행자보다 더 적은 시간으로 여행자를 구해야 했을 것이다.

 

여행자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구하려다 포기했던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졌다.

 

분명 그녀라면 여행자를 용서할 것이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이번에도 응당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미안해, 미안해 푸리나…. 널…. 널 구하고 싶었는데….”

 

여행자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뿐이었다.

그리고 여행자는, 그런 말들만 반복하는 자기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괜찮아. 그래도 결국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난…!”

 

감정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그에 맞춰 눈물도 한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시간도, 미래도, 그리고 내 마음도.

 

하지만 그녀를 구하지 못할뻔했다.

 

사실 세 번째 재료도 그렇다. 

내가 포기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를 살릴 방법을 어떻게든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나는-

 

“...푸리…. 나?”

 

푸리나는 어느새 여행자의 곁으로 다가와 슬픔에 빠진 여행자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사실…. 네가 여기 오지 않을 줄 알았어.

날 포기하고, 다른 삶을 살아갈 줄 알았어.”

 

“...”

 

“네가 처음 내 앞에서 죽었던 날, 어떤 남자가 나한테 그러더라.

‘여행자를 구할 생각이 있습니까?’라면서.”

 

아마 그 사람이라면, 그 청년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그 녀석, 난 포기했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건가.

 

“그리고…. 네가 왜 내 이마에 총구를 겨눴는지도 알게 됐어.”

 

“그건-”

 

“...괴로웠을 거야. 그렇지?”

 

푸리나는 어느새 여행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따뜻한 체온이 여행자의 머리를 감싸며 부드럽게 내려왔다. 

 

여행자는 그녀에게서 평온함을 느끼며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수없이 네가 죽는 날이 반복되었어.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었어. 그제야…. 네 기분을 알게 됐지.”

 

“...”

 

“...그러다 엔죠라는 마물을 네가 말해주었고,

이곳에서 널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미안해.”

 

“괜찮아. 드디어 널…. 만났으니까.”

 

여행자는 고개를 들어 푸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몸은 이미 절반쯤 투명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로, 물거품들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잠깐, 푸리나. 너 몸이-”

 

“...벌써 작별할 시간이네.”

 

“작별이라니, 무슨 소리야?”

 

여행자는 푸리나의 대답에 다시 자신의 오른손이 있던 받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은 아직 여행자의 오른손 위에 남아있었다.

 

희미하고 투명했지만, 그녀의 체온이 여행자의 오른손을 감싸고 있었다.

 

“멈춰, 아니야. 널 구하려고 내가-”

 

“여행자,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물론 지금 너와 대답한 ‘푸리나’는 없겠지만, 그녀의 운명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아니, ‘푸리나’는 너야. 과거의 푸리나도, 지금 이 시각을 살아가는 ‘푸리나’도 너라고.”

 

“맞아. 그냥 기억만 사라지는 거야.”

 

“아니, 그건-”

 

“...미래의 ‘나’가. 과거의 ‘나’를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잖아?”

 

여행자는 그녀의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같은 시간대에 사람이 둘이나 존재한다는 건, 역설이다.

 

하지만 동시에 존재한다는 건, 서로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지금 이야기한 이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염원과 기록 따위가 아니다. 이 ‘기억’은-

 

...하나의 ‘자아’이다.

 

“너는-”

 

“...나의 이름은 코레고스. 무대를 준비하는 자-”

 

장치의 작동이 점점 느려졌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점점 빠르게 사라져갔다.

 

“...미래의 내가 준비한 무대를, 과거의 내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네.”

 

“안돼, 안-”

 

푸리나는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거품만이 여행자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장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작동을 멈췄다. 

 

청년이 건네준 별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바닥엔 부서진 신의 눈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여행자는 푸리나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누더기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향기가 났다.

아마 여행자가 느꼈던 그리움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무대를 준비하는 자’라고? 아니야. 넌-”

 

여행자는 누더기를 끌어안고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넌, 최고의 배우였어.”

 

.

.

.

 

“으으- 아악….”

 

노인의 신음이 기록소에서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계속된 시간의 부하에 온몸이 뒤틀린 듯했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군요.”

 

청년은 쓰러진 노인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노인은 사방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혈액량은 적어서 치명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도저히 멈출 줄 몰랐다.

 

“아무도…. 없는가? 누가, 나 좀-”

 

“...시간의 흐름이 난장판이라서 오랜만에 왔는데, 이거이거. 너무 늦게 왔나?”

 

“...!”

 

청년은 갑작스레 기록소로 찾아온 의문의 실루엣을 보았다.

노인의 신음에 발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갑작스레 들이닥쳐 온 ‘사람’의 형체를 한 무언가는, 압도적인 힘을 내뿜고 있었다.

 

“...바르바토스, 여긴 어쩐일이십니까?”

 

기록소로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바람의 마신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난장판이 된 기록소 내부의 ‘운명의 시계’를 바라보다,

바닥에 고꾸라져 숨만 붙어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꽤 비범한데, 천리가 알면 어쩌려고 그러나?”

 

“바르바토스님, 누군가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안다면, 그건-”

 

“에이, 그건 너만 조용히 해주면 돼. 난…. 지금 바닥에 고꾸라진 그 녀석한테 볼일이 있거든.”

 

바르바토스는 청년에게서 시선을 옮겨 노인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은 온몸이 굽어져 마치 하나의 덩어리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흠…. 못된 놈 버릇 좀 고쳐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그럴 필욘 없을 것 같네.”

 

“바르…. 바토스, 날…. 비웃으러 온 게냐…?”

 

노인은 바르바토스의 모습을 보고 놀란듯한 표정을 짓다, 

이내 모든 걸 포기한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는 이미 그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온갖 흐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둔 것 치곤, 꽤 곱게 벌 받고는 있지만….

이 정도면 만족해. 오죽하면 바람이 네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니까.”

 

그는 말을 끝내곤 조용히 발걸음을 출구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볼일이 끝난듯한 모습이었다.

 

“...저, 바르바토스님.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요?”

 

청년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질문했다.

그에게 있어서도 지금의 상황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상황은 해결되었고, 운명의 비극은 막아졌다.

 

...하지만 이게 옳은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르바토스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청년의 기를 치켜세워주었다.

 

“모두가 만들어낸 결과를 아무 생각 없이 부순 저놈보단, 네가 백배는 더 나은 것 같은데?”

 

바르바토스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청년은 아마 바르바토스가 이 사건에 개입했다면, 훨씬 골치 아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당신의 대답입니까.”

 

운명이란 건 항상 필연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꿀 수 없고, 거스를 수 없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운명이다.

 

하지만 운명은 항상 그런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자신의 미래를 발굴해 나간다면-

 

 

운명은, 크게 바뀔 수 있다.




 

“다시는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시간의 마신’. ...그나저나 아무도 못 봐서 다행입니다. 

직접 이곳으로 올 수 있는 존재는 셀레스티아 인과…. ‘배신자’ 말곤 없으니까요.”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여행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지상으로 조용히 내려갈 준비를 했다.

 

.

.

.

 

여행자는 다시 폰타인 성의 밖에서 눈을 떴다.

 

깨질듯한 통증이 머리를 덮쳤다.

 

“...또 죽고 다시 살아난 건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질 모르겠네….”

 

여행자는 조용히 나무에 걸터앉아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볕이 여행자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기분 좋은 안락함이 나른함을 끌고 왔다.

 

여행자는 그렇게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어떻게 운명이 제대로 정렬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온 걸까? 아니면…. 다시-’

 

으으. 끔찍해라.

 

여행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젓다가, 문득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아, 주머니를 뒤져보면 되겠다!”

 

생각은 바로 실행으로 옮겨졌다. 

불행 중 다행히도 시계나 신의 눈 등, 잡히면 큰일 날 만한 것들은 주머니에 들어있지 않았다.

 

“해결한…. 건…. 가?”

 

여행자는 아직도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끔찍한 사건을 연속으로 겪다 정신이 피로해져서 그런 것인지 쉽사리 믿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혼잣말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러다 여행자는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자는 페이몬을 발견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쓰러졌다가 그 남자가 날 구하러 와준-’

 

“...아.”

 

정말 불행하게도 그 남성은…. 여행자의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어느샌가, 어디서 나온 건진 모르겠지만 그는 여기 있어선 안 된다. 

 

여행자는 붉은 머리의 청년을 바라보며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설마? 아니야. 제대로 된 거 아닌가? 아니, 역시 믿으면 안 됐나?’

 

온갖 생각이 여행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점점 여행자는 두려움에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여행자, 감사합니다.”

 

“...”

 

청년은 여행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여행자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여행자는 그제야 안도했다. 그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 끝난 거야?”

 

“네.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다행이야.”

 

여행자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풀려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청년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모든 걸 알려주겠다고 해서 다시 온 거야?”

 

“그렇습니다. 약속은 지켜야죠.”

 

예상대로, 그는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여행자에게 세세하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셀레스티아에는 관리자가 있는데, 그중 ‘천리 대행’이 독단적으로 운명을 지웠다.

 

그리고 ‘인간이 쟁취해 낸 운명’을 부정하는 대행을 본 청년이, 

여행자와 접촉해 노인을 설득할 시간을 벌려고 했었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여행자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청년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대행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다 시계가 깨지고, 푸리나가 그릇이 되고….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일들이야….”

 

“동감입니다.”

 

“그나저나, 용케 포기하지 않았네. 정작 포기를 제안한 건 네 쪽이었는데.”

 

“...아닙니다. 포기를 안 한 건 당신이잖습니까.”

 

“...아니야. 난-”

 

“아뇨, 당신이 없었으면, 폰타인이란 나라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가.

 

분명 나는 중간에 포기했었다. 그리고 포기한 대가로 시간을 되돌리지 못할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냈다. 멋지게 이야기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포기할 때까지는 포기한 게 아니니까요.”

 

그의 말이 맞다. 사실 나는 포기를 원한 게 아니라, ‘휴식’을 원했던 거니까.

 

...하지만 이 채워지지 않는 감정은 대체 뭘까?

 

여행자는 그와의 대화에서도 큰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세계를 구했다고는 했지만, 주연은 자신이 아니었다는 이 느낌.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행자, 폰타인을…. 세상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네 도움도 분명히 있어. 이건…. 너와 내가 구한 거야.”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잠깐, 그나저나 그 ‘시계’는 대체 뭐였어?”

 

여행자는 돌아가려는 청년을 붙잡고 시계에 관한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었다.

 

태엽을 돌려 힘을 받아들이고, 목숨을 바쳐 삼키는 기묘한 힘.

 

시간을 되돌린다는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 일어나니 그 힘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여행자였다.

 

“아, 가장 중요한 걸 말씀드리지 않을 뻔했군요.”

 

청년은 조용히 자신의 몸에서 모라 하나를 꺼냈다. 

모라의 중앙에 박힌 문양은 세 개의 타원이 서로 중심점에 얽혀있는 문양이었다.

 

“...잠깐, 그 문양은-”

 

여행자는 순간 뒤를 돌아 아직 꿈나라에 있는 

페이몬의 몸통 부분에 박힌 문양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어디선가 봤던 문양, 그건 바로-

 

“맞습니다. 태초의 강림자, ‘파네스’의 문양입니다.”

 

“뭐라고? 그럼, 시계가 파네스의…. 조각이라는 소리야?”

 

청년은 여행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파네스는 천리와의 전투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조각조각이나 세계에 흩뿌려졌죠. 시계는 그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이 사실은 나만 알고있어야겠다.

 

“...알려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차원 문을 열어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여행자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벤티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신의 눈을 가진 사람이 죽으면, ‘신’이 될 자격이 주어져 셀레스티아로 승천한다고 하지.]

 

“잠깐,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인연이 된다면, 만날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제 이름…. 말입니까?”

 

갑작스레 날아온 여행자의 질문에 청년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지만,

 

그는 의외의 대답을 내어놓곤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 성씨는 말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뭔데?”

 

“제 성씨는…. ‘라겐펜더’입니다.”

 

“잠깐-”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여행자는 순식간에 사라진 청년을 찾으려고 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여행자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준 그가 어째서 자신을 도와주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붉은 머리, 어디선가 봤나 했는데. 그게-’

 

...설마 라겐펜더 가문일 줄이야.

 

“라겐펜더 가문의 사람 중 한 명이라면…. 몬드의….”

 

“...여행자, 왜 아까부터 혼잣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어느새 페이몬은 잠에서 깨어 여행자의 주위를 빙빙 날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흐릿한 눈으로 하품하며 여행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뭐야, 또 나만 모르는 이야기지!”

 

“다음에 알려줄게. 아 참, 배고프지 않아? 성에서 뭐 좀 먹을까?”

 

“웬일이래?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어?”

 

“그런 일이 있어.”

 

“으- 또 나만 모르는 이야기 자꾸 할래?”

 

여행자는 아직 자신이 세계를 구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이전과 같은 장소, 이전과 같은 상황.

 

아무리 청년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믿을 수 없는 게 사람의 심리다.

 

물론 여행자는 그의 말을 믿는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풀리지 않는 의문 감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여행자는 발걸음을 폰타인 성의 한 카페로 옮겼다.

 

따스한 커피의 향기,

화사한 봄날의 햇볕.

 

평온해 보이는 성은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위화감의 원천은 얼마 안 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 아닌,

정말 자신이 미래를 구했느냐에 대한 여행자의 마음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푸하- 나 배불러 여행자…. 졸려….”

 

평소답게 페이몬은 말도 안 되는 양을 먹어치운다. 

이번에도 몇만 모라가 깨지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의뢰야 새로 받으면 그만이니까.

 

“난 커피 한잔 더 마실 테니까, 잠깐 눈 좀 붙여도 돼.”

 

“그-그래? 그럼…. 하암-”

 

여행자는 능숙하게 아루에에게 가서 커피를 주문한다.


"에스프레소 한잔 주세요."

 

향긋한 에스프레소는, 피어오르는 향기와는 다르게 쓰고 강렬한 맛이 특징이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강렬한 맛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강렬한 인상은 깊은 생각을 지운다.

 

여행자는 잠깐의….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내가 봤던 그 날의 푸리나는 대체 누구였을까.

 

현재를 살아가는 푸리나일까, 아니면 미래에서 과거로 온 푸리나일까.

 

자세한 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만큼 괴로워하며 시간을 돌렸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뚜렷했다.

 

여행자는 진중한 표정으로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쓴맛이 입안에 감돌다 이내 그윽한 향기로 번져간다.

 

나는 이 맛이 좋다. 순식간에 생각을 명료하게 만들어주니까.

 

“음냐…. 더, 더죠…. 히히….”

 

페이몬녀석, 그렇게 먹고도 꿈속에서 뭘 더 먹는 것 같다.

 

여행자는 천천히 시간을 확인했다. 평소라면 조금 뒤에 성벽이 무너질 것이다.


https://youtu.be/cu--dSs5MFA


 

약간의 긴장감이 여행자의 마음속에서 흘렀다. 

쓸데없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여행자에게 있어 ‘소음’은 하나의 중대 사항이다.

 

“...셋”

 

이전처럼 시간을 읽는다. 

 

불안감에서 나오게 된 혼잣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미래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확인하고 싶다.

 

“...둘”

 

순간 피가 빠르게 맴돈다. 

마셨던 커피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강렬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다.

 

“...하나.”


“어, 여행자? 이런 데서 만나다니, 우연이네?”

 

“-!”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대신해 등장한 건…. 다름 아닌 푸리나였다.

 

“푸리나? 여긴 어쩐일이야?”

 

여행자는 평소답게 능청스럽게 말을 받아친다. 

 

그러나 여행자의 마음속은 이미 뒤죽박죽이었다. 

커피를 연거푸 들이켰지만 좀처럼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외부인이 폰타인 사람한테 ‘여긴 어쩐일이야?’라고 말하는 건, 대체 무슨 의미람?”

 

푸리나는 어느새 여행자 옆에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쓰는 향수가 공중으로 살짝 흩어지며, 여행자의 코끝을 스친다.

 

“...아.”

 

이 향수, 그 누더기에서 나던-

 

옅지만 확실한 향이다. 

향기를 맡은 여행자는 어느새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여행자? 왜 갑자기 눈물을-”

 

갑작스레 흘러나온 감정은 억제하기 힘들었다. 

 

여행자는 금방이라도 목놓아 울고 싶은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두 눈가를 급하게 소매로 닦으려 하던 참이었다.

 

“자, 받아.”

 

갑작스레 여행자의 두 눈앞으로 푸른빛 손수건이 밀려온다.

여행자는 흐려진 시야로 눈앞에 놓인 것이 손수건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냈다.

 

그녀의 손수건을 받고 여행자는 급히 눈물을 훔쳤다.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눈물을 겨우 닦아낸 여행자는, 그녀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여행자, 괜찮아?”

 

“...괜찮아. 그냥…. 슬픈 이야기를 보고 왔거든.”

 

“슬픈 이야기?”

 

“...들어볼래?”

 

여행자는 그녀의 질문에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기사와 공주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은 결국 공주를 구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무거운 마음이 여행자를 감정의 심해로 가라앉게 했다.

 

분명 자신이 본건 재앙이 끝나지 않은 미래의 푸리나였을텐데.

그녀의 입으로도 ‘본인’이라고 말을 했을 텐데.


세계는 그녀의 존재를 망각했을지도 모른다.

 

‘망각’이라는 건 참 치사하다.

너무나도 편리하고, 가끔 큰 충격을 잊거나 무르게 할 때 본능적으로 쓰게 되는 기억의 개념이지만.

 

반대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게 만든다.

 

자신을 희생해 과거의 자신을 구한 그녀도,

세계의 관점에서는 ‘망각’일 것이다-

 

“...그렇게 기사와 공주는…. 행복하게…. 잘….”

 

다시 감정이 솟구친다. 

결국, 나는 그녀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니라, 그녀의 무대를 준비한 사람일 뿐이다.

 

분명 여행자는 그녀를 구했다. 세계를 구했다. 하지만 이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은 대체-

 

“...푸리나?”

 

어느새 푸리나는 여행자를 껴안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여행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가깝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천천히 여행자의 귓가에 다가왔다.

 

‘두근, 두근, 두근-’

 

그녀는 살아있다. 나는 그녀를 구했다. 

더 이상 그녀에게서 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행자는 그녀를 구했다고 말을 하지 못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푸리나의 입에서 믿지 못할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뭐로 할까?”

 

여행자는 순간 고개를 들어 푸리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었다.

 

“푸리나, 설마-”


...예상이 틀린것 같다.

그녀는…. 돌아왔다.

 

“고마워, 여행자. 포기하지 않아 줘서.”

 

아니야, 나는-

 

나는 그저-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무언가 턱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겨우 운이 좋아서 해낸 건데, 운명이 그 길로 인도했기에 해낼 수 있었던 건데.

 

어째서 당신은 그런 말을-

 

여행자와 푸리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500년간 끝없는 미래를 기다리며 희생을 강요받은 그녀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지금이야 아픔을 공감할 사람이 옆에 있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해.”

 

“아니야. 네 노력이 없었으면…. 난 이 세상에 없었는걸.”

 

여행자는 여전히 사과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제목은 좀 나중에 정하기로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쉬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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