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genshin/101293061 - 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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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숨이 쉬어지는 물속 내부인 것 같았다.

 

‘마지막에 내가 뭘 했더라.’

 

여행자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와 헤어지고 첫 번째로 만났을 땐, 푸리나는 멜모니아궁 잔해에 깔려 죽었다.

 

그녀는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땐, 그녀와 함께 건물 안으로 도망쳤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화재가 났었다. 여행자는 그녀를 지키다 결국 둘 다 불타 죽었다.

 

세 번째는…. 폰타인 밖으로 그녀를 데리고 나오려 했다. 

하지만 성벽에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마지막은 기억조차 흐릿했다. 

방아쇠를 당긴 건 기억이 났는데, 

그것이 자신의 머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

 

여행자는 그제야 모나가 예지했던 ‘미래’를 생각해냈다.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

 

앞으로 벌어질 미래들이 바로 그것들일까.

 

정말 그녀를 구할 수 있을까.

 

여행자는 말없이 물속 밖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수면 위로 햇살이 비쳤다. 조금 눈부셨지만, 

여행자에겐 그 햇빛이 희망보다는 절망으로 보였다.

 

“...이젠 정말, 푸리나를 다시 못 보게 될 수도 있는 걸까?”

 

시간은 그의 말처럼 서서히 기화했다. 

일분일초가 십분 한 시간이 되었다. 

점점 늘어나는 시간의 압박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여행자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돌아온 걸까.

사실 푸리나가 아니라 내가 시간을 돌렸던 게 아닐까.

 

그의 말이 사실은, 거짓말이 아닐까.

 

사색은 점점 길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죽은 건 시간 되돌림의 조건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파동.

죽은 뒤 시신 위로 떠 오르는 연기.

...그리고, 자신이 이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정신을 차리게 될 때까지의 시간.

 

“...푸리나는, 결국 죽은 건가.”

 

어느덧 여행자의 사색은 혼잣말로 변해갔다. 

‘어차피 그녀의 환영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문제는 없겠지.’라고 생각하던 찰나,

여행자는 문득 ‘환영’에 관심이 생겼다.

 

‘...지금도 있으려나.’

 

여행자는 다시 눈을 떠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녀는 존재했다. 


그녀는 여전히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행자는 자연스럽게 그녀 쪽으로 헤엄쳤다. 

그러자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여행자, -”

 

“...들려.”

 

여행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이제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마치 여행자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듯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여행자의 말에 반응했다.

 

“여행자, 시간을-”

 

“...저번에도 이야기 한 거잖아. 시간을 돌리라고 했었나?”

 

여행자의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여행자는 그런 ‘환영’의 반응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라고? 그럼 대체-”

 

여행자의 대답에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하는 듯했다.

 

마치, 묵혀두었던 말을 힘겹게 꺼내는 것처럼,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떨렸다.

 

여행자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혹시나 자신의 시야가 흐려지고 있진 않은지 수어 번은 확인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멀쩡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건가.

 

여행자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를 했다.

 

푸리나의 ‘환영’도, 그런 여행자의 태도를 인지하는 듯했다.

 

이윽고 숨소리가 퍼졌다. 뒤를 이어 ‘환영’이 이야기한 내용은-



“여행자. 시간을 되돌리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여행자의 시야가 천천히 흐려졌다.

 

“뭐라고? 푸리나, 그게 대체-”

 

점점 흐려지는 시야는 여행자의 몸을 잠재웠다. 

여행자는 의식을 붙잡으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두 눈을 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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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정신 차리십시오. 대체 무슨 짓을-”

 

“뭐, 뭐야…. 여긴 어디야?”

 

여행자는 깨질듯한 편두통 때문에 주변의 상황을 인지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여행자를 깨운 건 다름 아닌 청년이었다. 페이몬은 청년의 옆에서 조용히 날고 있었다.

 

“미친 겁니까? 스스로 죽을 생각을 하다니, 그것 때문에-”

 

“...알았어. 하지만 정말….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었어.”

 

“...대체 뭔 이야기를 하길래 그렇게 살벌한 이야기를 해…?”

 

페이몬은 어느새 여행자의 옆에 날아와 여행자의 상태를 날아다니며 천천히 점검했다.

 

밖으로 보이는 상처는 딱히 없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페이몬이었다.

 

“여행자,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데! 그나마 가까이 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어.”

 

페이몬은 겨우 정신을 차린 여행자에게 곧장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을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 덕분에 여행자는 빠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여행자는 자신을 위해 애쓴 페이몬에게 감사를 표했다.

 

“...네가 왔다는 건, 일단 좋은 소식이 있다고 믿어도 되겠지?”

 

여행자는 페이몬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옆에서 대답을 기다리는 청년을 향해 물었다.

 

청년은 여행자의 기대와는 다르게, 어딘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은 뭐야? 설마-”

 

청년은 여행자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자신의 주머니에서 회색빛의 별 여섯 개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여행자는 그의 손에 놓인 별들을 바라보며, 

그가 드디어 첫 번째 재료, ‘별’을 구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 하하…. 드디어 첫 번째 재료를 모았네.”

 

여행자는 분명 기뻐했지만, 표정에서는 슬픔이 묻어나왔다.

 

고생했던 과거보다, 앞으로 더 잔혹하게 펼쳐질 미래에 의욕을 잃은 것인지,

여행자는 그저 굳은 표정으로 그의 손 위에 놓인 별을 건네받았다.

 

여행자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별을 받기 전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그에게 묻고 싶어졌다.

 

“...이제, 안 좋은 소식을 말해봐.”

 

청년은 여행자의 대답에 잠깐 주춤하다,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여행자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그가 어떤 소식을 말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표정부터 나오는 불안감이 점점 엄습해왔다.

 

“여행자…. 이제 시간을 되돌리지 못합니다.”

 

“...나 때문이야?”

 

“그건….”

 

청년은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여행자는 그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아-”

 

여행자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기회는 단 한 번인가.

 

여행자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계속되는 끔찍한 상황이 여행자의 정신을 좀먹었고,

버티지 못해서 조금 쉬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그것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여행자는 더 이상 나아갈 자신을 잃었다. 

 

재료를 모은 것이 무슨 대수인가.

앞으로 나아갈…. 시간조차 남지 않았는데.

 

여행자는 문득 지금의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폰타인에 재앙이 덮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방법이…. 이제 아예 없는 거구나.”

 

“...정확히는 힘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실 푸리나 씨에게,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했습니다만….”

 

“넌 진짜….”

 

여행자는 변함이 없는 청년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약한 혐오감을 느꼈지만,

그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기에, 입장의 차이 정도로 그를 이해했다.

 

“성공한 것인지, 실패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힘이 그대로 ‘증발’했습니다.”

 

“...지금 푸리나는, 폰타인 성안에 있고?”

 

“아마…. 있을 겁니다. 이 시간에 다른데에 있을 리는 없잖습니까.”

 

여행자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대로라면 이 상황에 화를 내는 게 정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평온했다.

 

이미 포기해서일까.

 

여행자는 조용히 생각했다. 

그나마 남은 이 별을 가지고 엔죠에게 돌아갈지,

아니면…. 남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낼지.

 

엔죠에게 돌아간다면 적어도 별을 넣고 시도라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장담하지 못한다. 

푸리나가…. 사람이 아니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그녀에게 돌아가면, 죽기 전까지 그녀의 얼굴을 마음껏 바라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모두가 죽을 것이다. 여태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결정했어.”

 

“무엇을…. 말입니까?”

 

청년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난 여행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여행자의 대답에 의아함을 느끼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폰타인 성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행자는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과거라면,

남은 시간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