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genshin/101215111?p=1 - 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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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답에 여행자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청년은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녀를…. 하나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푸리나, 듣지 마.”

 

“푸리나씨. 당신의 몸에서 나오는 그 파동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여행자가 시간을 돌리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해.”

 

여행자는 순간 그의 목소리에 화가 치밀었다.

그가 푸리나를 설득하려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그녀가 ‘힘’을 담은 그릇이 된 건지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여행자의 마음과는 다르게,

늑대들은 느리지만, 확실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진실조차도 밝히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여행자는 결정을 내려야 했지만, 그의 대답에 아무 말도 못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그런 여행자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서 뭔가를 주섬거리며 꺼내기 시작했다.

 

“...받으십시오. 당신의 희생이 모두를 구할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그가 꺼내서 건네준 건 다름 아닌 권총이었다. 

여행자는 은빛의 총신을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만약 푸리나가 ‘힘’의 그릇이라고는 해도, 

시간을 돌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거 아냐?”

 

여행자는 그녀의 손에 거의 올려질 뻔한 권총을 가로챘다. 

차가운 감촉이 여행자의 오른손에 전해졌다. 

 

생각보다 차가운 감촉에 약간 놀랐지만, 

피가 약간 묻어있는 권총의 총신을 천천히 바라보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행자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표정에 오히려 큰소리친 여행자가 점점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 

‘시계’가 아니라 사람 안에 힘이 들어간 거니까, 다른 방법은 충분히-”

 

“...여행자,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

 

당연히 안다. ‘죽음’을 먹이로 줘야 한다. 그렇기에 여행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죽음만이 살길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그녀를 구해야겠다면, 그 총으로 안식을 주십시오.”

 

청년은 여행자가 손에 들고 있는 권총을 힐긋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얼마 뒤면, 이 권총은 발포될 것이다. 아니, 발포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모두가 원하는, ‘구원’에 한 발짝 가까워질 수 있다.

 

“단정 짓지 마. 언제나 해결책은 있었어. 아직 시간은-”

 

“여행자. 시간이 없습니다. 저번에도 말씀을 드렸-”

 

“닥쳐!”

 

여행자는 순간 화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청년의 멱살을 잡았다.

 

오른손에서 권총이 떠나갔다. 그대로 여행자의 손에 들렸던 총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공중에 떠버린 권총은 바닥으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다, 

그대로 푸리나의 구두 앞으로 미끄러지듯 굴렀다.

 

“...”

 

그녀는 말없이 자신의 발 아래에 놓인 권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권총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촬영 때 썼던 소품과는 느낌이 달랐다.

무게감이 온몸에 전해졌다. 강렬한 무게감이 그녀를 사색에 잠기게 했다.

 

아마…. 이 조그마한 쇳조각을 당기면. 큰 소리와 함께 이 큰 구멍으로 총알이 나가던 거였나.

 

그들의 이야기는 정황상 나의 희생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푸리나는 청년의 대답을 믿지 못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여행자의 표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창백함이 서려 있었다.

 

푸리나는 여행자를 믿었다.

눈앞에 있는 붉은 머리의 청년이 아니라, 오랜 벗의 판단을 믿었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가지고 오란 말이야!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돌아온 게 고작 이런 거야? 이런 게 어떻게-”

 

여행자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져 갔다. 

어느새 늑대들은 그런 여행자의 마음을 짓밟으며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탈출은 틀렸다. 이제 이 세 사람은 전부 죽을 것이다-

 

‘두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파동이 느껴졌다.

이전에 느꼈던 파동은 그저 심장의 고동 소리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울려 퍼진 고동은…. 컸다. 

 

누구라도 그 고동이 그녀의 몸속에서 울려 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들려온 고동 소리에 눈앞의 남성과 여행자는 언행을 멈추었다.

남자의 옷깃이 천천히 내려갔다. 여행자는 말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행자, 방금 당신도 느꼈을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네.”

 

그의 대답은 평소처럼 단호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런 대답이 싫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여행자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믿고 싶지 않은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푸리나는 그런 여행자의 표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신의 손에 쥔 권총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은빛의, 화려한 총신의 권총.

아마 이미 죽어버린 그림자 수사청 대원의 물품 중 하나일 것이다.

 

푸리나는 천천히 권총을 자신의 오른손에 쥐었다.

장갑에 달린 푸른빛의 보석이 총신과 함께 빛났다. 

 

마치…. 그녀의 희생을 축복하는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푸리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여행자는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래, 태엽을 돌린다고 했잖아. 지금 힘이 담긴 ‘그릇’도 다르니까, 

맞아, 시계를 ‘파괴’하면서 시간을 돌린 적은 없었잖아. 그러니까-”

 

“...”

 

“그러니까…. 제발…. 아무 말이라도 해줘.”

 

여행자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청년은 그런 여행자의 두 눈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왜 아무 말이 없는 거냐고! 왜 하필 지금!”

 

여행자의 언성은 더 높아졌고, 늑대들의 거리도 불과 몇십 미터 남짓이다.

 

이대로 가다간 전부 죽는다. 그럴 바엔 지금 내가-

 

“...여행자. 내가…. 죽으면, 모두가 살 수 있는 거지?”

 

“...어?”

 

여행자는 흐려진 두 눈을 푸리나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이미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고 있었다.

 

“푸리…. 나? 뭘 하려는-”

 

“...여행자. 내가 죽으면…. 여행자가 살 수 있는 거지?”

 

그녀는 조용히 방아쇠에 올려진 검지에 천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여행자의 눈에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또렷하게 보였다.

 

여행자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언제…. 그녀가 권총을 가져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막아야 한다.

여차하면 그녀라도 살려 폰타인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반드시-

 

그러나 여행자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녀의 결심은 굳어진 듯했다.

 

“당신이 죽으면,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습니다.”

 

청년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도 이렇게 된 상황이 달가운 눈치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없다며 재촉하는 느낌의 말투로 그녀를 독촉했다.

 

그러나 푸리나는…. 그의 대답 이전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희생이 자연스러워서도 아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아마, 폰타인의 백성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씻지 못할 죄의식을 준걸지도 모른다.

 

이미 그녀는 충분히 현실이 괴로웠다. 

 

‘아아악-!’

 

그녀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의 메아리는 꺼지지 않았다.

눈앞에서 한사람, 한사람이 죽어갈수록 메아리는 짙어졌다.

 

...죽을 만큼 괴롭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음으로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따를 생각이 있었다.

 

죽음이 회피가 아닌 ‘수단’이 된다면, 차라리 그편이 낫지 않을까.

 

“그만해. 멈춰. 아니야, 이건 옳은 게 아니야.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여행자. 난 괜찮아.”

 

푸리나는 어느새 아름다운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과는 다르게 그녀의 오른손은 그 어느 때보다 떨리고 있었다.

 

“여행자, 난 말이야-” 

 

“푸리나, 제발-”

 

“여행자가 행복할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해.”

 

거짓말.

 

말은 그렇게 해도 지금 울고 있는 건, 뭐라고 설명할 건데?

 

여행자는 푸리나의 오른손이 방아쇠를 누르기 전에 그녀에게 뛰어가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느려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집게손가락 만큼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빨랐다.

 

‘잠깐, 안-’

 

여행자의 메아리가 끝나기도 전에 큰 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고 따뜻한 체온이 여행자를 감쌌다. 입안에선 비릿한 맛이 맴돌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녀의 머리에서 천천히 하얀빛의 연기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계가 내뿜어내었던 그 연기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녀는 ‘힘’의 ‘그릇’이 된 게 사실이었다.

 

“안돼, 안돼, 안돼-”

 

여행자는 순식간에 쓰러진 푸리나를 향해 다가갔다.

 

“왜, 어째서….”

 

여행자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맥박을 쟀지만 더 이상 그녀의 심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청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여행자를 터무니없는 운명의 굴레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죄책감만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아아아….”

 

여행자의 절규에 수계 늑대들이 점점 여행자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행자는 여전히 그녀를 껴안으며 잔인한 운명에 절규하고, 또 절규했다.

 

...하지만 괜찮다. 운명의 방아쇠는 이미 당겨졌으니까.

 

.

.

.

 

또 그곳이다.

 

여행자는 다시 이질감을 느끼며 물속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시계가 파괴되었을 때 보게 된 이 낯선 공간.

 

여행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의 뒤에 푸리나의 형체가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있구나.”

 

여행자의 예상대로 여행자의 뒤편엔 푸리나의 형체가 공중에 서 있었다.

 

공중에 뜬 푸리나의 형체는 여행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작고, 조용한 말소리로 중얼거리겠지.


 

“시간….”

 

여행자는 순간적으로 들린 그녀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간? 시간이 없다는 소리인가?’

 

여행자는 지금의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전해준 말에 단서가 하나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푸리나, 좀 더 자세히-”

 

여행자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저번처럼 그녀에게 닿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그러나 여행자가 그녀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녀의 형체는 점점 희미해져 갔고,

여행자의 의식도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

 

여행자는 필사적으로 닫히는 눈꺼풀에 저항하며 헤엄치고 또 헤엄쳤지만, 

닿지 못한 그녀의 모습을 뒤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

.


“...그래서, 의뢰를 받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캐서린의 당황 섞인 말투가 여행자의 의식을 붙잡았다. 

여행자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헉- 헉-”

 

꾹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마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컴컴한 우주 속에서 겨우 헤엄쳐 나온 듯했다.

 

오랫동안 죽기 직전까지 숨을 참은 것처럼, 

고통스러운 답답함과 시원한 해방감 때문에 몰려오는 숨을 겨우 내뱉고 있었다.

 

“..여행자, 괜찮아? 갑자기 숨을-”

 

“저는 괜- 괜찮아요. 그리고 의뢰는 안 받을게요. 미안해요!”

 

여행자는 시간을 되돌리기 전처럼 캐서린의 의뢰를 가볍게 거절했다.

의뢰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기도 했지만, 한시가 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의 대화로 자신의 시간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체감했다.

 

평소대로라면 페이몬의 외침을 듣고 깨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벌써 캐서린과 의뢰를 수락하기 직전까지 시간이 밀렸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이로 인해 청년의 말이 전부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끔찍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해.’

 

여행자는 점점 초조해짐을 느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최대한 빨리 이 미친 짓을 끝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여행자가 초조해진 이유는 간단했다.

 

시간을 되돌리려면, 그녀를 죽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

.

.

 

“...뭔가 이상하군. 계속해서 시간이 반복되고 있는 느낌이야.”

 

노인은 지속해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시감이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청년은 그의 반응을 조용히 지켜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한때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시계는 파괴되었다. 그리고 힘은 ‘푸리나’라는 존재에게 이전되었다.

 

힘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노인이 이 사실을 알아채기는 힘들 것이지만,

점점 조여오는 노인의 눈치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너 같은 놈들이 뭘 느끼겠나?”

 

노인은 당연한 듯 청년을 멸시하며 다시 태엽을 돌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노인에게 질문했다.

 

“...어르신,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뭔가?”

 

“어르신이 하시는 이 계획을, 감히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청년의 대답에 빠르게 태엽을 돌리던 손을 서서히 멈추며 고개를 돌려 청년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청년은 그의 시선에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노인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좋다. 이제야 날 말릴 생각이 없어진 것 같군.”

 

노인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태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는 세계를 연구했지. 그러다 하나의 이치에 도달했던 적이 있었다.”

 

노인은 천천히 태엽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세계의 ‘규칙’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은, ‘규칙’이 알아서 처리하더군.”

 

“어르신, 그 말씀은-”

 

“...그래. 나는 우리 동포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붕괴’라는 힘을 이용하려고 한다.”

 

청년의 예상이 맞았다. 

 

노인은 천리의 규칙뿐 아니라 세계의 규칙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의 계획을 알아낸 청년은 다급한 목소리로 노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어르신, 이건 규칙뿐 아니라 세계를 기만하는 행위 아닙니까. 

그분께서 아신다면 징계만으론 끝나지 않을 겁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어르신이 가장 혐오하고 싫어했던 힘이 아닙니까.”

 

청년의 대답에 노인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년의 표정은 잔잔한 그의 대답과는 다르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당장 우리의 운명이 그 머저리 하나 때문에 위협받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미리 대처하는 게 맞지 않나?”

 

노인은 다시금 청년을 쏘아붙였다. 그는 청년의 대답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말해보게, 이건 자네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야.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선, 더러운 힘을 빌려야 할 때도 있는 걸세.”

 

노인은 확신에 찬 대답으로 청년을 구박했다. 그러나 청년도 당할 생각은 없었다.

 

“어르신, 단순히 운명을 지워버리고 세계의 ‘규칙’에 모든 걸 맡기는 건 미련한 짓 아닙니까?

또 한 번 그때의 재앙이 이 행성을 덮친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이 정도 수준은 통제할 수 있네, 그러니-”

 

“말해주십시오, 어르신. 어르신이 지운 건 ‘운명’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에 대한 모든 연결고리를 지우려는 것이 아닙니까?”

 

청년의 날카로운 추리였다. 노인은 그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보십시오. 한 사람의 운명을 지우는 것 자체만으로 이런결과가 나올수는-.”

 

노인은 그의 대답에 움직이던 태엽을 조용히 멈추었다. 그리곤 천천히 손뼉을 치며 껄껄 웃기 시작했다.

 

“...뭡니까?”

 

“훌륭하군, 훌륭해.”

 

노인은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조용히 태엽을 조종하던 손을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 청년을 쳐다보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좋아. 자네의 추리가 날카로웠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그런데 말이야, 하나 간과한 사실이 있다네.”

 

청년은 그의 대답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노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식은땀이 천천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적이 지속될수록, 긴장감도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내가 지우려는 건, 신을 ‘사칭하는’ 녀석의 운명이 아니야.”

 

“...뭐라고요?”

 

“그래, 제대로 들었네. 

‘포칼로스’가 대행으로 세워둔 그…. ‘푸리나’라는 녀석의 운명을 지우려는 게 아닐세.”

 

노인은 허공을 바라보며 흐릿한 기억을 조금씩 끄집어내었다. 

아무래도 그는 청년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포칼로스 그 머저리가 무슨 수를 썼는진 모르겠지만, 그 녀석의 운명을 지웠더니-”

 

“...‘푸리나’의 운명이 같이 지워진 겁니까.”

 

“그렇지. 머리만큼은 똑똑하니 아직 별 탈 없이 이곳에 있는 거였던 거구만.”

 

노인은 청년의 대답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청년은 그의 대답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운명을 지웠더니 같이 지워진다니, 그렇다면 운명을 공유하는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어. 운명을 공유할 수는 없다.’

 

청년은 한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이 가능성이라면, 그녀의 운명 자리가 같이 지워져 버렸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어르신, 그럼 그 푸리나라는 작자는 혹시-”

 

“...그래. 포칼로스의 일부겠지.”

 

청년은 노인의 대답에 소름이 돋았다.

 

어째서 폰타인의 모든 이가 수계 늑대 형태의 ‘붕괴’에 전부 죽어갔는지.

왜 ‘붕괴’가 그녀만 노리지 않고 모두를 지옥으로 끌고 갔는지 전부 설명이 가능했다.

 

포칼로스의 운명이 지워지면, 푸리나의 운명이 같이 지워진다. 

그 이유는 푸리나가 포칼로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폰타인의 예언의 석판이 가르치는 인물은 다름 아닌 푸리나였고,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르신, 전부 알고 계셨던 겁니까?”

 

청년은 놀란듯한 눈빛으로 노인을 쳐다보며 그에게 따졌고,

노인은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대부분은 알고 있었지.”

 

노인은 당황한 청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청년은 그 어떤 때보다 그의 미소가 섬뜩하다고 느껴졌다.

 

“어르신, 그들의 운명을 지우면 예언이 실행된 폰타인만이 남게 됩니다. 

그렇기에 ‘붕괴’가 폰타인 시민 전부를-”

 

“잘 된 것 아닌가? 어차피 ‘규율’님이 에게리아에게 내렸던 저주였으니 말이다.”

 

“아니, 그건-”

 

“운명을 거스른 저들의 잘못이지.”

 

노인은 더 이상 청년의 대답을 받지 않으며 몸을 돌려 다시 태엽을 만지기 시작했다.

청년은 그런 노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통받는 여행자와 푸리나라는 작자를 위해서라도 노인을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했지만,

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어르신을 설득하는 계획은 빈번히 실패한다. 그를 막아설 방법은 진정 없는 건가?’

 

분명 예언이 실행된 폰타인만이 남는다는 사실은, 

세계 자체의 결과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과정’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웠다.

 

세계의 균열은 언제나 원인에서 발생하지만, 

그 균열의 크기를 결정짓는 건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청년은 그 사실 때문에 여행자에게 시계를 넘겨 모든 운명을 맡겼다.

 

하지만 여행자도 큰 진척이 없었다. 

 

물론 여행자가 모든 걸 해결할 것이라고 믿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런 대책 없이 여행자에게 시계를 넘겼다는 사실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는 노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를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변에 펼쳐진 결계를 바라보며 물리적으로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반대로 부하를 줘서 어르신을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아니다. 이 방법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설령 수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일반적인 인간의 정신력을 가진 여행자라면 분명 버거울 터.

 

그는 점점 머리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아무리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해도 운명의 먹구름이 그의 생각을 좀먹었다. 

 

결국, 청년은 포기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짓궂은 운명이 가로막는 듯했다.

여행자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운명에 여행자를 끌어들인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에 더더욱 여행자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여행자. 미안합니다.”

 

그는 더 이상 희망을 느끼지 못하며 붕괴하는 폰타인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처럼, 평화로운 폰타인은 이제 곧 ‘붕괴’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청년은 운명을 지워서라도 결과를 도출하려는 노인보다, 

과정을 바꾸려는 자신이 더 터무니없는 계획을 실행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

.

.

 

여행자는 다시 돌아와 천천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되짚기 시작했다.

 

-우선, 지워져 버린 그녀의 운명.

 

운명을 지워버릴 정도의 물건이 셀레스티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건 큰 소득이었지만,

그 정보는 당장 필요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직접 조작을 할 수 없었다.

청년도 자신에게 그 시계를 조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이전에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던 여행자는 운명을 결속시킬 무언가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여행자는 자신의 기억 저편에서 ‘무언가’에 걸맞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분명, 분명 어딘가에서…. 들었던 적이 있는데.”

 

운명과 관련된 무언가.

 

여행 도중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때, 그것의 이름이….

 

“...운명의, 운명의-”

 

여행자는 아파져 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과거의 기억 속에서 운명이라는 범주를 미친 듯이 찾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기억이라는 책자를 찾아 한 장, 한 장씩 넘기며 기억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수메르에서 경험한 기억의 한 장면에서 기적과도 같이 지금 상황에 필요한 ‘뭔가’를 찾아내었다.

 

“...그래, ‘운명의 베틀’.”

 

여행자는 오른손을 주먹 쥐어 반대편 손바닥을 탁하고 치며 깨달았다는 듯 “아!” 하고 소리 질렀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여행자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뛸 뜻이 기뻤다.

 

‘...그런데 잠깐. 이걸 알만한 사람이 주변에 있을까?’

 

갑작스레 떠오른 ‘운명의 베틀’은 여행자에게 있어 마치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지만,

문제는 이 ‘베틀’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지, 또 누가 그 위치를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행자는 다시 고민에 빠지며 폰타인 성 상공의 벽에 붙은 거대한 시계를 바라보았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는 어느덧 점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행자는 수십 분 내로 운명의 베틀을 찾아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손이나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 그녀를 죽여야만 했다.

 

“...그렇겐 안 둬. 어떻게든…. 어떻게든 막아내야 해.”

 

여행자는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여행자의 귓속을 스쳐 가기 시작했다.

 

“...저 사람, 여행자 아니야?”

 

“저런 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보는 눈이 많다. 조금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

.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오똔산 중턱은 여느 때와 같이 상쾌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여행자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답답했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운명의 베틀.

 

클로타르 알베리히가 500년 전에 처음 창조해낸 개념.

 

사람의 운명을 다시 짤 수 있는 이 ‘운명의 베틀’은, 

듣기에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행자에겐 오히려 그가 이 ‘운명의 베틀’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것이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신을 믿지 못하고, 죄인을 믿어야 한다니.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있으려나.”

 

여행자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말도 안 되는 상황들과, 

실낱같은 증거만으로 미래를 바꿔야 하는 현실에 그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500년 전 등장한 개념이 만약 제대로 작동했다면,

지금의 티바트 생물들, 아니 하다못해 심연의 생물들만큼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증거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여행자가 생각을 할 때마다 걸림돌로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시도는 좋았어. 하지만 정말 완성을 하긴 한 걸까? 완성했다면 어떻게-’

 

여행자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수메르에서 우연히 만났던 ‘클로타르’라는 인물과,

그가 집착했던 거꾸로 매달린 신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고민하던 찰나였다.

 

“여긴 무슨 용건으로 또 온 거지, 여행자?”

 

여행자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익숙한 형체의 붉은 무언가가 책을 들고 서 있음을 보게 되었다.

 

“...엔죠.”

 

여행자는 붉게 불타오르는 심연 사도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녀석이라면 분명 ‘운명의 베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 우연히, 무언가에 이끌려 이 산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뿐이었지만,

이전에 그가 여기서 고서와 함께 큰 힌트를 주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얼굴을 보니 조금 당황한 눈치인데, 반대로 반갑다는 표정도 같이 짓고 있군.”

 

“정확해. 물어볼 게 있어.”

 

엔죠의 예상은 정확했다. 여행자는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을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그의 대답에 마음이 같이 읽힌 듯했다. 언제봐도 참 기묘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의 베틀’을, 사용하고 싶어.”

 

여행자는 뒤이어 말을 이었다.

시간을 되돌렸다는 말은 빼고, 최대한 간결하게 엔죠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제정신이야? [별종], [별종] 거렸더니 이상한 소리를 해대네.”

 

엔죠는 ‘운명의 베틀’에 대해 화들짝 놀랐다는 동작을 취하며 여행자에게 한마디 했다.

 

그러나 여행자는 진심이었다.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이 이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또 보자고 한 건 너잖아. 물론 이렇게 만날 생각은 없었겠지만.”

 

“잘 알고 있네. 무엇보다 네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는걸.”

 

그는 여행자의 대답을 익살스럽게 받아치는 와중에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정황상 그는 ‘운명의 베틀’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엔죠에게 있어 ‘운명의 베틀’의 비밀을 발설하는 것은,

제아무리 [별종]인 자신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여행자. 그 위대한 계획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다. 다만….”

 

“다만?”

 

여행자는 그의 대답을 보채며 재촉했다. 물론 엔죠도 여행자의 마음이 이해는 갔다.

 

분명 운명의 베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준이라면, 그만큼 절박하단 소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여행자’가, 운명의 베틀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뿐더러,

여행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누군가의,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기에 엔죠는 여행자의 눈빛을 바라보며, 

호기심과 신뢰 사이에서 대답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휴-.”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부탁을 할 정도라면,

지금 당장 하늘이 두 쪽으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결국, 엔죠는 여행자의 결의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뒤편에 거대한 차원 문을 열기 시작했다.

 

차원 문은 마치 현실 세계의 공간에 금을 내듯, 

유리 파편처럼 공중에 금이 가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쩌저적-’

 

마치 얼음에 금이 가 깨지듯 섬뜩한 소리를 내며 균열이 가던 공간은 이윽고 큰 구멍을 만들어 내었다.

 

“일단 들어와.”

 

여행자는 눈앞에서 벌어진 기묘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가,

엔죠의 대답에 정신을 차리고 보랏빛으로 빛나는 공간 속으로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기묘하지만 따뜻한 감각.

 

어딘가 푸근한 감각이 부드럽게 여행자의 손을 감쌌다. 

여행자는 편안한 감각을 느끼며 아직 넘어가지 못한 자신의 나머지 몸들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이건.”

 

여행자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사방에 거꾸로 매달린 조각상들은 신상처럼 생기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모습을 비추며 공중에서 조금씩 진동하고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여행자는 이윽고 공간의 중심으로 시선을 향했다.

공간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기계 옆으로 그보다 두 배는 더 큰 톱니바퀴들이 벽 쪽에 다닥다닥 붙어 천천히 맞물리고 있었다.

 

‘철컹’, ‘끼익’ 거리는 소리는 너무나도 커서 바로 코앞이 아니면 대화를 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여행자가 주변을 돌아보던 사이,

엔죠는 자신이 되돌아온 포탈을 다시 닫다가 여행자에게 발톱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던져주며 큰소리로 외쳤다.

 

“돌아가고 싶으면 그걸로 공간을 쭉 베어버리면 돼.

너희들이 쓰는 간이 워프 포인트 같은 거니까, 사용법은 어렵지 않을 거야.”

 

여행자는 공중에 떠오른 발톱을 덥석 받고는 그의 호의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발톱을 받고 뒤를 돌아본 여행자는 웅장한 기계와, 

기계 속에 담겨있는…. 사람 같은 형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엔죠, 저게 뭐야?”

 

“잘 안 들려.”

 

“엔죠, 투명한 관 안에 들어가 있는 저 사람 형체는 뭐냐고!”

 

“아, 저거.”

 

엔죠는 조용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 이내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듯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순식간에 바꾸어 페이지를 ‘촤르륵-’소리와 함께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초 동안 얼굴을 빠르게 움직이며 책을 읽는듯한 모습을 보이던 그는,

이내 양손으로 책을 ‘탁’ 소리와 함께 덮고 여행자에게 말했다.

 

“여행자, 운명의 베틀이 뭔지 대충 알고 있다면, 저게 누군지는 잘 알 텐데?”

 

“아니, 안 그래도 시끄러운데 역으로 질문하면 어떻게 알아!”

 

여행자는 엔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질문에 다시금 수메르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클로타르가 이야기했었지. 운명의 베틀을 만들겠다고.’

 

클로타르를 기점으로 연쇄적으로 생각하던 여행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투명한 관 속에 있는 사람 형체의 무언가가 츄츄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츄츄족은 일반적인 츄츄족이 아니었다. 그에겐 이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리베르트?”

 

“그래.”

 

“...클로타르가, 자기 아들을 ‘운명의 베틀’의 촉매로 사용하고 있다고?”

 

여행자는 눈앞에 떠 있는 존재를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어 확실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틀림없이 통 안에 떠 있는 건 카리베르트가 맞았다.

 

“일단 시끄러우니까, 잠깐 멈춰두도록 하지.”

 

엔죠는 순식간에 여행자 앞으로 다가와 기계 옆에 달린 레버를 당겨 기계의 작동을 멈췄다.

 

기계는 순식간에 덜컹거리는 큰 소리를 내며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잠깐, 이렇게 그냥 멈춰도 되는 거였어?”

 

“음, 작동을 좀 더 수월하게 하려고 평소에 공회전시켜둔다고 생각하면 돼.”

 

“공…. 회전? 그건 무슨 소리야?”

 

“됐다. 일단 사용법부터 알려주지. 내가 왜 이야기를 꺼내기 꺼렸는지 곧 알게 될 거야.”

 

엔죠는 당황한 여행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운명의 베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운명의 베틀의 기본은, 대상에게 필요한 것들을 재료로 사용해야 하지.

간단하게 추린다면 시간, 공간, 생명이 있겠군.”

 

여행자는 엔죠의 대답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어딘가 비현실적인 재료들의 이름을 듣고 당황한 기색으로 그의 대답에 반론했다.

 

“구할 수는 있는 것들이야? 비유적인 표현인 것 같은데.”

 

“뭐…. 네 말이 맞기는 한데, 아니기도 해.”

 

그는 다시 자신의 손 위에 책을 올려 빠른 속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낡은 것 같은 형태의 책은 그가 책자를 넘길 때마다 보랏빛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그건 고서인가?”

 

“사용 설명서야.”

 

“...묘하게 현실적이네.”

 

엔죠는 조용히 책을 더 들여다보았다. 

그사이 여행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작동을 완전히 멈춘 기계의 부품들을 조용히 훑었다.

 

조금 전까지 맥동하던 기계들은 어느새 힘을 잃은 시계처럼 조용히 멈춰있었다. 

 

소음은 사라졌지만, 

차갑게 식은 시체처럼 아무런 미동조차 없는 톱니바퀴는 여행자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다 읽었다. 너무 오랜만에 꺼내 읽어서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는 데 좀 걸렸네.”

 

“그래서, 세 개의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는 없어?”

 

여행자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엔죠를 바라보며 질문했지만,

그는 여행자의 눈빛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행자는 그의 한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기에,

이내 고개를 푹 떨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말해봐. 들어나 보자.”

 

“여행자, 사람이 죽으면 운명의 별이 어떻게 되는지 아나?”

 

그의 질문이었다.

여행자는 엔죠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용히 생각하다,

이전에 몬드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별똥별?”

 

엔죠는 여행자의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이윽고 그는 여행자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게 재료야. ‘공간’에 해당하는 것이지.”

 

“‘공간’의 재료가 어째서 별똥별인 건데?”

 

“‘공간’이란 건, 무언가를 ‘포함’한다는 의미이지 않나?”

 

여행자는 엔죠의 대답에 잠깐 말을 잃었다. 

그가 여행자를 보았을 땐, 깊게 생각하느라 말이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행자는 별똥별의 의미와, 

이나즈마에서 보았던 두 개의 신의 눈을 떠올리며 조금씩 퍼즐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빈 운명.”

 

“이해는 빠르군.”

 

“하지만, 아무리 빈 운명이라도, 그만큼의 염원이 없으면 불가능-”

 

“나머지 재료가 뭐라고 했었지?”

 

여행자는 엔죠의 대답에 이전에 그가말했던 재료들을 곱씹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재료는 ‘공간’이자, ‘빈 운명’.

 

두 번째는 ‘시간’.

 

세 번째는 ‘생명’.

 

여행자는 남은 두 가지의 재료를 바라보며 생각을 연쇄적으로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공간, 시간, 생명-

 

“공간, 시간, 생명….”

 

그 순간 머릿속이 갑자기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뭔가가 여행자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헤집고 지나갔다.

 

“엔죠…. 이건…!”

 

“시간과 공간은 염원을 대체할 수 있지. 그 말인즉슨-”

 

여행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돌아보았다.

 

엔죠는 여행자의 표정을 이해했다. 

그리고 여행자는 그 어느 때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행자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공간은 빈 운명을, 시간은 운명의 속박을, 생명은-

 

운명의 베틀은 말 그대로, 기억을 그릇에 담은 다음 재구성하는 기계였다.

 

“엔죠, 질문 하나만 할게.”

 

여행자의 말은 뚜렷했다. 

그러나 얼굴에 비친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창백한 모습으로 공포가 서려 있었다.

 

“...우린, 세계에 ‘없는’ 사람을 창조하는 기계 앞에 있는 거야?”


.

.

.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그래. 이 기계로 운명을 다시 짠다고 해도, 네가 원하는 결과랑은 다를 거라는 거야.”

 

여행자는 엔죠의 대답을 믿고 싶지 않았다.

 

기껏 겨우 떠올려서 찾아왔는데, 

몇 번을 죽는 것을 반복하고, 그녀를 살리려고 그녀를 죽이기까지 했는데.

 

노력했던 게 고작 이런 걸 위해서-

 

“뭐, 운명을 새로 짜고 싶어 하는 ‘본인’을 재료로 쓴다면 문제가 없지. 

결과물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 한다만.”

 

“...그래서 클로타르가 불사의 저주를 푼 거군. 이제야 말이 됐어….”

 

분명 불사의 저주에 걸린 사람은 죽지 않는다. 어떤 방법으로든 인체가 유지된다.

 

...하지만 운명을 뒤집어씌웠다면 이야기는 다르지.

 

여행자는 순간 푸리나를 설득해 운명의 베틀을 작동할 계획을 세우려 했지만,

시간을 되돌려 그녀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클로타르 본인조차도, 어떤 형태가 되어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이 사실이, 그녀를 데려와 기계를 가동하게 시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여행자는 그렇게 딜레마에 빠졌다.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지워진 운명을 다시 구축하는 대가가 이런 거라니. 너무 잔혹한 운명이 아닌가.

 

“...엔죠. 우선 ‘그릇’은 그렇다고 쳐. ‘운명을 담을 별’은 어디서 구해야 하지?”

 

“그건 네가 알아서 구해야지.”

 

“...”

 

여행자는 엔죠의 대답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남겨진 희망이랄게 고작 이런 거라니.

 

“그래. 이만큼이나 도와줬는데 뭘 더 달라고 하면 그건 실례겠지.”

 

“...”

 

[기억과 생명은 고사하고, 운명을 담을 별은 어디서 구해야 할까.]

[이전처럼 별똥별이 몬드에 갑작스럽게 내려오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여행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방법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꿀 수 없고, 거스를 수 없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운명이라고 했던가.

 

여행자가 사색에 잠긴 사이, 

갑자기 심연의 공간 밖에서 알 수 없는 큰 울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다. 이제야 갈피를 잡나 했는데.

 

“엔죠, 다음에 올게. 다음에 올 땐 네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차근차근 재료를 구해봐라. 그러다 보면 해답이 나올 수도 있겠지.”

 

“퍽이나 위로가 되는 말이네.”

 

여행자는 그 말을 뒤로 엔죠가 건네준 발톱으로 공간을 그었다.

 

그어진 공간은 보랏빛 선으로 죽 이어지다, 유리창처럼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적-’

 

불쾌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크지만, 어딘가 편안해지는 소리.

 

여행자는 부서진 공간 밖의 폰타인 성을 바라보았다.

이미 늑대들이 성벽을 부수고 있었다. 

 

...아마 이 시간이라면 내가 도착할 때쯤엔 그녀가 죽어있겠지.

 

여행자는 심호흡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나아가는 건 자유이니까. 그 누구도 자신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다신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없을지도 몰라.’

 

단순한 이유는 여행자의 몸을 균열 밖으로 던졌다.

 

균열에서 멀어질 때마다 편안한 감촉이 점점 불쾌한 오한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몸이 다 통과되었을 때 즈음엔, 어느새 온몸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행자가 나간 뒤, 균열은 빠르게 닫혔다.

마치 금 간 현실이 없었던 일처럼, 빠르게 공간이 아물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말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겠어?”

 

엔죠는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무심코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의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지금은 알려줄 때가 아닌 것 같군.”

 

“그래, 여행자에겐 조금 가혹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누군가’의 말에 “훗-”하고 헛웃음을 뱉으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할 말은 아니잖아. 그렇지, ‘재단사’?”

 

‘재단사’는 엔죠의 말에 쿡하며 웃었다.

 

마치 이 모든 것들을 예상하기라도 하듯, 여유로운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구하지 못한 게 바로 이 ‘별을 담을 공간’인데. 여행자가 구해줄 수 있으려나?”

 

재단사의 말에 엔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라면, 해내고 말걸.”

 

“그랬으면 좋겠네. 그나저나, 왜 ‘시간’과 ‘생명’은 구할 필요가 없다는 건 안 알려준 거야?”

 

재단사는 집요하게 엔죠를 파고들었다. 

엔죠는 재단사의 질문에 딱히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너도 참 악취미군. 이 생각도 네가 한 것일 텐데?”

 

재단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엔죠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가. 뭐, 가끔은 극적인 요소도 필요하다고 느껴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