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genshin/101139936?category=%EC%B0%BD%EC%9E%91&p=1 - 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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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악-!”

 

여행자는 당황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잿빛의 강 내부에서도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이 시간이면 느비예트와 푸리나가-!”

 

여행자는 자신이 예상보다 늦었음을 깨닫고 단걸음에 잿빛의 강 출구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니야. 내가 좀 더 빨리 움직이면 돼.’

 

그들이 버텨줬으면, 

반복되는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여행자는 빠르게 잿빛의 강을 나와 폰타인 광장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고,

힘겹게 달려 도착한 광장 엘리베이터 앞엔 쓰러진 느비예트와 

그를 안고 있는 푸리나가 광장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느비예트, 정신차려! 느비예트!”

 

“푸리나! 앞에!”

 

여행자는 순식간에 검을 빼들어 푸리나의 앞에 들이닥친 수계 늑대의 몸통을 말끔하게 베어내었다.

 

“쿠오오-!”

 

금빛의 피를 공중으로 흩뿌리던 수계 늑대는 힘없이 쓰러졌고, 

갈라진 수계 늑대의 내장 사이로 흔들리는 푸른빛의 두 눈동자가 여행자의 눈에 비쳤다.

 

“푸리나, 느비예트는-”

 

“...전 괜찮습니다 여행자. 그러니- 쿨럭-”

 

전투 중 자세히 보지 못해 알 수 없었지만, 

느비예트의 복부엔 한 뼘만큼의 자상이 나 있었다.

 

분명히 이 크기라면 수계 늑대의 발톱 크기일 것이다. 틀림없다.

 

여행자는 고개를 돌려 푸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고, 두 눈동자는 갈 곳을 잃은 채 벌벌 떨리고 있었다.

 

“푸리나? 정신차려, 푸리나! 이런-!”

 

여행자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며 남아있는 수계 늑대의 수를 빠르게 세었다.

 

‘하나, 둘, 셋….’

 

그렇게 몇 번을 세던 여행자는 끊임없이 불어나는 수계 늑대의 머릿수에 숫자를 세는 걸 포기했다.

 

우선 상처를 입은 느비예트와 공포에 빠진 푸리나를 어딘가로 옮겨야 했다. 

분명 몇 분 뒤엔 멜모니아궁이 방주와 부닥쳐 폭발할 것이고, 그렇다면 비교적 안전한 곳은-

 

‘시간만 충분하다면, 엘리베이터 내부에 있던 늑대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빠르게 움직이기만 하면….’

 

“푸리나, 도와줄 테니 엘리베이터로 가자, 이 이상은 버틸 수 없어.”

 

“하지만, 시민들이…!”

 

“...미안, 전부 구할 수는 없어. 그리고 폰타인에는 아직 네가 필요해.”

 

여행자는 푸리나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고는 느비예트를 부축해 세웠다.

 

느비예트는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으로 간신히 틀어막으며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행자, 고맙습니다.”

 

“...들어가 쉬고 있어. 놈들은 어떻게든 막아볼게.”

 

여행자는 멀어지는 푸리나와 느비예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아직 넉넉했다. 

 

‘잡는 속도보단 증원되는 속도가 더 느렸어. 내가 좀만 빠르게 움직인다면 해볼 만 해.’

 

여행자는 늑대의 진격 속도, 증원되는 개체의 수를 생각해본 결과,

자신이 좀만 무리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행자는 다시 뒤를 돌아 점점 불어나는 수계 늑대들을 바라보았다.

 

남은 시간은 수어분 남짓.

 

예상대로라면 곧 라이오슬리의 방주가 터져 멜모니아궁이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엔-

 

엘리베이터로 내려온 수계 늑대가, 푸리나를 덮칠 것이다.

 

여행자는 고개를 들어 눈앞으로 다가오는 수계 늑대 군단을 바라보며 붉게 빛나는 검을 공중에서 꺼냈다.

 

붉은빛의 검은 언제라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날카로운 칼날을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하나.’

 

순식간에 여행자는 검을 고쳐 쥐며 달려드는 수계 늑대를 차례차례 베어나갔다.

 

“윽-!”

 

여행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팔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 능력은, 과도하게 사용하면 몸에 무리가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이 고비만 넘기면, 내가 모든 늑대를 죽일 수 있다면.

 

...하다못해 모두가 죽게 되더라도, 그다음에라도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여행자는 지금 목숨을 태우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열셋.’

 

열세 마리 째. 늑대의 숫자는 베면 벨수록 점점 늘어나는 듯했다.

 

여행자는 끊임없이 불어나는 수계 늑대들의 숫자를 보며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엘리베이터에 늑대가 내려올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지금 이 시각이라면, 그녀가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려고 할 시간이었다.

 

분명 그때와 같다면, 굳게 잠긴 엘리베이터 문이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다.

 

바로 지금이다. 예상과 같다면 시간이 딱 맞을 것이었다.

 

‘지금이야. 이 이상 지체했다간-’

 

여행자는 점점 늘어나는 수계 늑대들을 뒤로한 채, 

광장 앞의 엘리베이터로 빠르게 뛰어가던 그 순간이었다.

 

“팔이…. 뜨거워.”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오른손이 점점 뜨거워짐을 느끼던 여행자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

 

오른팔의 절반은 이미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고통은 점점 여행자의 감각을 녹이고 있었고, 

여행자는 오른팔의 감각을 천천히 잃어가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이 이제야 전해져 왔다. 

 

싸울 땐 느낄 수 없었지만, 

직접 오른팔의 참상을 보고 나니 고통이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통에 울부짖을 시간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운명의 장난 속에서 구해야 했다.

 

이대로 한 번 더 그들이 죽는다면, 시간을 되돌린 의미가 없어진다. 

 

만약 전부 죽는다면, 다시 끔찍한 죽음의 공포를 끌어안고 되돌아와야 한다.

 

여행자는 끔찍한 고통을 상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자신의 복부에 찔러넣었던 검의 고통은 여행자를 몸서리치게 했다.

 

‘...내가 구하지 못한다면, 그들도 분명 그런 고통을 느끼겠지.’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어. 죽일 거면 차라리 날 죽여보라지.

 

“푸리나-!”

 

폰타인 성 중앙에 있는 엘리베이터 탑승구를 벌컥 연 여행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느비예트와 푸리나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행자의 두 눈에 

입구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길게 이어진 막대한 양의 혈흔이 들어왔다.

 

“...아니야, 계산은 완벽했을 텐데.”

 

여행자는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허리춤에서 다시 한번 칼을 꺼내려던 그때였다.

 

“윽-!”

 

“땡그랑-!”

 

허리춤에서 꺼낸 칼은 힘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오른팔에서 욱신거리는 감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오른팔이 녹는 속도가 점점 가속화되어갔다.

 

‘이대로 가다간 탈출하기도 전에 오른팔을 잃겠어.’

 

“...여행자?”

 

여행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흘러나왔던 곳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기둥 뒤에서 흘러나와 조금 작았지만, 이 목소리는 분명히 그녀였다.

 

“푸리나, 괜찮아?”

 

“나는… 흑- 나는… 괜찮아. 그런데…. 느비예트가….”

 

기둥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여행자는 그녀의 목소리에 자신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 

기둥 뒤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내었다.

 

여행자의 눈앞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여행자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닫힌 문 중앙에 껴있는 푸른색의 옷조각,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줄줄 새어 나오는 대량의 혈액.

 

잔뜩 긴장한 얼굴로 도통 진정하지 못하는 그녀.

 

여행자는 주변을 더 둘러보다 그녀의 팔 상태가 이상한 것을 보게 되었다.

 

“푸리나, 너…!”

 

“...”

 

그녀의 왼팔이 팔꿈치까지 잘려있었다. 

팔 끝에 지혈한 흔적은 보였지만, 그녀의 푸른 소매 사이로 계속해서 피가 조금씩 새고 있었다.

 

“...푸리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푸리나는 여행자의 대답에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리며 와락 안겼다.

그녀의 목소리엔 반가움과 함께 공포가 섞여 있었다.

 

“여행자, 여행자…. 느비예트가…. 저 안에….”

 

“...뭐?”

 

여행자는 그녀의 대답에 다시 한번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의 문을 바라보았다.

 

“날 구하려다가….”

 

엘리베이터 문 아래로 피가 끊임없이 쏟아져나왔다.

안쪽에서는 쿵쿵대는 소리와 짐승의 울음소리 비슷한 것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네 팔은? 늑대들이 벤 거야?”

 

여행자의 대답에 푸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온몸을 떨며 대답했다.

 

“느비예트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늑대를 보고 날 밖으로 밀치고 문을 닫았을 때, 

왼팔이 껴버려서….”

 

“...”

 

여행자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착잡함을 느꼈다. 

 

시간 계산을 잘못했나? 

아니야, 분명 성벽이 부서지고 난 뒤 정확히 10분이 지난 상태였어.

시간을 잘못 보지 않았어. 그때까지만 해도 난 모험가 길드 위에 있는 거대한 시계를-

 

잘못된 시간 계산에 자신을 자책하던 여행자가 사색에 잠긴 사이, 

여행자의 뒤편에선 수계 늑대들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이대로 가다간-’

 

여행자는 조용히 자신의 왼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시계를 찾았다.

 

‘슥- 슥-’ 소리와 함께 온 감각을 집중해 시계를 찾는 여행자를 본 푸리나는, 

여행자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여행자? 그건….”

 

“찾았다.”

 

여행자는 다시금 주머니 속의 체인을 붙잡았다. 

까슬 거리는, 얇게 가공되어 조금 날카로운 체인을 

두 손가락으로 집고 주머니에서 빼려던 그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본 여행자는, 

순간 자신이 뒷문을 막아야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단 것을 깨달았다.

 

“여행자, 뒤에-”

 

여행자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아-”

 

여행자는 점점 느려지는 시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여행자의 눈은 천천히 뒤쪽으로 향하며, 눈앞의 푸리나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뒤에서 공격이…. 놈들이 날 밀친 건가?’

 

그렇게 천천히, 

뒤쪽으로 시선이 옮겨지던 여행자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순식간에 들이닥친 수계 늑대들과-

 

사방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자신의 허리를 보게 되었다.

 

“-!”

 

“여행… 자?”

 

푸리나는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난 여행자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가팔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행자는 그녀를 어떻게든 구하려 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허리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시…. 계”

 

여행자는 자신의 왼팔을 움직여 시계의 태엽이라도 돌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왼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잘린 왼손에 들려있던 시계는 푸리나를 향해 공중에 붕 떠 날고 있었다.

 

푸리나는 잔뜩 창백해진 얼굴로 오른손을 움직여 공중으로 떠오른 시계를 낚아챘다.

 

하지만 그녀는 시계의 조작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여행자는 점점 흐려지는 시야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붙잡을수록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여행자의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그렇게 여행자는 강렬한 고통에 의식을 잃었다.

그러자 고통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와 동시에 몸도 조금씩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

 

푸리나는 받아낸 시계의 조작법을 몰라 어떻게든 작동시켜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의 팔은 온전하지 않았다. 태엽을 돌리는데에도 굉장히 애먹고 있었다.

 

푸리나는 잔뜩 피투성이의 얼굴로 쓰러진 여행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여행자, 안돼…. 제발 날 떠나지 말아-”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수계 늑대의 끔찍한 울음소리와 함께 섬뜩한 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졌다.

 

여행자는 마지막으로 남은 의식을 쥐어짰다. 

그러나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행자는 점점 숨이 멎어가며 그녀의 목과 함께 시계가 떨어짐을 보았다.

 

‘...안…. 돼.’

 

시계는 순간 머금고 있는 푸른빛의 연기를 주변으로 퍼트렸다. 

마치 담겨있는 힘을 방출하기라도 하듯,

자유가 된 연기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흩어지다 모습을 감췄다.

 

힘이 떠난 시계는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어찌나 강하게 떨어졌는지,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시계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진짜…. 죽는 건가?’

 

“짤그랑-”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파편 중 하나가 여행자의 눈앞에 떨어졌고,

여행자는 시계의 파편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파편에 박혀있던 문양은…. 타원 세 개가 서로 엮어 중심점에 모여있는 형태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익숙한 문양이었다.

 

‘저 문양…. 어디서 본…. 적이….’

 

그 말을 끝으로 여행자의 의식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

.

.


“...꿈…. 인가?”

 

여행자의 숨이 천천히 돌아왔다. 분명 자신은 죽었다. 시계는 파괴되었다.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나 여행자는 천천히 자신의 숨이 쉬어짐을 느꼈다. 

 

여행자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자신의 몸이 알 수 없는 부유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행자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깊은 바닷속 같았다.

 

여행자는 자신의 오른팔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 녹아내리던 팔은 어느새 말끔해져 있었다.

 

오른팔이 멀쩡한 것을 본 여행자는, 

이곳이 자신이 죽고 난 뒤 온 세상. 즉, 사후세계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감각, 숨이 쉬어지는 바다-

 

“...나는, 죽은 건가?”

 

여행자는 크게 숨을 쉬었다. 

입속으로 물이 들어오는 듯하다, 전부 숨으로 바뀌어 들어옴을 느꼈다.

 

여행자는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넓은 바다.

 

어딘가 익숙한 주변의 별들.

 

그리고-

 

“...행…. 자”

 

주변에서 들려오는 희미하지만 뚜렷한 목소리.

 

여행자는 의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양옆, 위아래를 둘러보던 여행자는, 자신에게 오는 시선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

 

뒤를 돌아본 여행자의 눈앞에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그녀가 공중에 조용히 떠 있었다.


“....”

 

그녀는 조용히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자에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여행자는 그녀의 대답을 더 가까이 가서 들으려 했다. 

 

그러나 여행자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의 형체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잠깐, 푸리나. 뭐라고?”

 

“여….”

 

여행자는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모습은 더더욱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있는 힘껏 그녀의 위치로 헤엄쳐간 여행자는,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형체만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을 뿐이었다.

 

.

.

.

 

“...여행자? 여행자!”

 

페이몬의 대답이었다. 여행자는 어느 때보다 그녀의 대답이 반갑다고 느껴졌다.

 

“...페이몬.”

 

여행자의 두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었다. 

 

“...여행자? 왜 그래?”

 

여행자는 순식간에 페이몬을 껴안으며 엉엉 울었다.

 

페이몬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껴안으며 

대성통곡을 하는 여행자가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 어떻게든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꽉 껴안은 여행자의 품 안을 탈출하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이몬, 미안해. 미안해….”

 

“여, 여행자…. 나 숨막….”

 

페이몬은 여전히 여행자의 행동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서럽게 울고 있는 여행자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아 맞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여행자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자신의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힘차게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없어.”

 

한참 동안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여행자는 점점 창백한 표정으로 변해갔고,

페이몬은 그런 여행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없다는 거야?”

 

여행자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회중시계가 없어. 근데 나는 돌아왔고. 어떻게 된 거지?’

 

여행자는 천천히 기억을 곱씹었다. 

분명 회중시계는 수계 늑대의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온 거지?

 

여행자는 몇 가지 가설을 세우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설 첫 번째. 이 모든 상황이 거짓이다.

 

여행자는 이 생각이 번뜩 들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겼다.

 

“캐서린 씨, 이번 의뢰가 원소가 통하지 않는 수계 늑대 섬멸인가요?”

 

캐서린은 여행자의 갑작스러운 대답에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행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벌써 소문이 다 났나?”

 

...첫 번째 가설은 실패였다. 

차라리 청년이 거짓말을 해서 악몽을 꾼 것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캐서린의 대답으로 가설은 거짓이 되었다.

 

두 번째. 수메르 때처럼, 이 모든 것은 꿈이고 그것과 관련된 열쇠가 근처에 있을 것이다.

 

여행자는 두 번째 가설에 집중했다. 

시계가 없어졌는데 현실이 바뀐 게 없다면, 분명 ‘열쇠’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알아내야 하지?

 

여행자는 두 번째 가설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이전에는 나히다가 도움을 주어 상황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캐서린 씨, 이 의뢰는 못 받을 것 같아요.”

 

여행자는 기다리고 있는 캐서린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의뢰를 정중히 거절했다.

 

이 의뢰를 받고 늑대를 처리한다면, 

다시 폰타인 성으로 돌아왔을 때 시민들이 학살당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면-’

 

여행자는 조용히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들어 폰타인 성 내부를 내리쬐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여행자의 두 눈을 태우는 듯 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햇빛은 이윽고 오색 빛의 찬란한 유리 사이를 드리우며, 

하늘을 가르는 무지개처럼 폰타인 성 거리 위로 빛을 비추고 있었다.

 

이 강렬한 햇빛도 오늘 오후가 된다면 먹구름에 가려져 어둠을 드리울 것이다.

 

여행자는 머지않아 닥쳐올 미래를 생각하며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운이란 건 항상 종잡을 수 없다. 

언제나 손을 뻗어 잡으려 노력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 같은 존재다.

 

그렇기에 운은 스스로가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잡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다면-

 

흐르는 운명을 거슬러 올라가 주겠다.

 

여행자는 허리춤의 칼이 태양 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

.

.

 

 

청년은 다시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 느껴진 기시감은 조금 달랐다.

 

“...설마.”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명히 뭔가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뭔가’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청년은 다시 생각을 집중하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지상은 재앙을 맞이하기 전의 폰타인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이 비치는 평화로운 거리,

행복한 소리가 들려오는 따뜻한 분위기.

 

그러나 그는 여행자에게서 있어야 할 기운이 느껴지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제야 뭔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니야. 확실히 ‘그’ 물건의 기운은 아직 남아있어. 하지만 어째서-”

 

청년은 당황한 눈빛으로 폰타인 성 내부를 천천히 들여다 보았다. 

 

익숙한 기운이 분명 어딘가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시계’는 파괴되었다. 

하지만 시계 속에 담겨있던 ‘물건’의 힘은 남아있었다.

 

“대체 누가….”

 

그는 섣불리 짐작하지 않으며 깊게 생각했다.

분명 자신이 지상에 없던 사이, 시간을 되돌리던 때 뭔가 사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시계가 파괴되었다고 한들, 기운이 지상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이 사실을 여행자에게 알려야 했다. 

분명 여행자는 시계의 파괴로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윽….”

 

그가 지상의 여행자에게 소식을 알리려 몰래 방 밖을 빠져나오려던 그때,

노인의 신음이 그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노인의 상태는 점점 이상해져 갔다.

 

태엽을 직접 조작하는 힘의 크기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반복하는 시간이 그의 몸에 부하를 주고 있었다.

 

몸으로 흐르는 시간의 부하는 점점 강해져 그의 핏줄을 천천히 꼬아놓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몸이 뒤틀리기 전에 시간 반복을 끝내야 했다.

 

노인의 독단적인 결정은 ‘천리’에게 있어 금기와도 같았지만-

 

그의 ‘죽음’도 셀레스티아에 있어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그가 기시감의 원인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노인이 아니라, 지상의 여행자였다.

 

그렇게 그는 노인이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빠르게 지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행자에게 알려야 해, 아직 되돌릴 방법이 남았다고.”

 

.

.

.

 

 

“느비예트,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여행자. 제가 당신을 믿는다고 해도, 시민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행자는 멜모니아궁으로 뛰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느비예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느비예트는 여행자의 말을 믿는 듯 보였지만,

그에게 있어 여행자와의 신뢰 문제보다, 시민들을 통제하는 문제가 더 컸다.

 

여행자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눈 앞에 있는 ‘느비예트’라는 존재마저도 지킬 수 없었다.

 

“...느비예트, 알겠어. 그럼 라이오슬리에게 방주를 좀 더 빨리 준비해달라고 전해줘.”

 

“...여행자-”

 

“느비예트, 내 말을 믿을 때쯤엔 모두가 죽을 거야. 

폰타인은 예언보다 더한 재앙을 맞이할 거라고.”

 

여행자의 간곡한 부탁에 느비예트는 고개를 숙여 곰곰이 생각했다.

 

느비예트는 여행자를 믿고 싶지 않았다. 

여행자가 전해준 이야기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원소 공격이 통하지 않는 늑대.

순식간에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가는 재앙.

 

...그리고 예견된 자신의 죽음.

 

이 모든 사실을 순식간에 믿으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설령 이야기를 해준 사람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해도 말이다.

 

느비예트가 믿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보다 공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으로서 

만약 여행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자신이 쌓아 올린 공적에도 금이 갈 수 있었다.

 

“...여행자. 만약 전부 거짓말이라면,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느비예트는 이 질문만큼은 여행자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신뢰의 문제였다.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분명히 불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여행자는 그의 태도를 이해했다. 

갑작스럽게 다가와 멸망을 예언하는 사람이라니,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바로 내쫓겨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전부 설명하고 설득하기엔 여행자 자신도 말이 안 되는 일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에게 모든 것을 알려줄 수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성벽 밖에서 큰 소리가 울리면 그땐 너무 늦어.”

 

“...알겠습니다. 라이오슬리씨에게 연락해두겠습니다.”

 

여행자는 말을 마친 뒤 멜모니아궁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느비예트는 멀어지는 여행자의 뒷모습을 보며, 

밖에서 대기하던 수사청 대원 한 사람을 불러 ‘방주’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여행자,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비예트는 여행자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지만, 

재앙이 닥치기 전이기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의 예언이 틀렸으면 좋겠군요.”

 

그렇기에 여행자를 믿어보기로 했다. 

평소라면 이런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

.

.

 

예상했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여행자는 성벽 위에 우뚝 서 폰타인 성을 둘러싼 산과 바다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성 밖은 평소와 같은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여행자는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이 

조금 뒤면 화마에 휩싸일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오는 걸까….”

 

여행자는 마녀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들의 ‘등장’, 그리고 ‘이 세계의 생물이 아닌’ 것.

 

마녀는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늘여놓았다. 

하지만 폰타인 성이 하루아침에 습격당해 수십 분 만에 멸망한다는 이야기도,

상식선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밖을 한참 동안 뚫어지라 쳐다보던 여행자는, 어느새 재앙의 시간이 점점 다가옴을 느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방주는 언제쯤-”

 

여행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다가 괴상한 소음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수계 늑대들인가? 아니야, 예상보다 빠른데….”

 

귀를 찢는듯한 소음과 함께 바다 위로 물살을 가르며 떠오른 금빛의 형체는 다름 아닌 방주였다.

 

“왔구나!”

 

여행자는 웅장하게 떠오르는 방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라면 모두를 살릴 수 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진작 이럴걸. 이랬으면 시간을 되돌릴 필요도 없었을 텐데.”

 

여행자는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겨 멜모니아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폰타인 시민 모두를 태운다면, 악몽과도 같은 늑대들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

 

‘일단 다시 느비예트에게 돌아가야….’

 

여행자가 날아오르는 방주를 바라보며 폰타인 성의 성벽을 따라 달리던 그때였다.

 

금빛의 방주 뒤로 뭔가가 매달려 함께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여행자는 방주에 매달린 형체를 자세히 보았다. 

사람도, 동물도 아닌 큰 형체의 무언가가 위태롭게 매달려 방주의 표면에 천천히 상처를 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분명 예상보다 더 빨랐을 텐데.”

 

방주의 뒤편엔 수계 늑대 한 마리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방주와 같은 금빛으로 번쩍이는 털 때문에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표면에 저렇게 큰 상처를 낼 생물이라면 금빛의 수계 늑대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행자는 그제야 방주가 왜 멜모니아궁에 도착하자마자 추락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돌리기 이전보다 방주의 도착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뭔가 이상했다.

 

“...뭔가 잘못됐어. 어디부터 잘못된 거지?”

 

여행자는 혼잣말을 곱씹으며 전속력으로 달려 멜모니아궁의 정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느비예트, 느비예트-!”

 

“조용히 좀 해주세요. 저희 업무 중입니다.”

 

멜모니아궁에서 근무하는 행정업무원들이 여행자의 큰 소리에 짜증을 내며 여행자를 막아섰다.

 

“지금 여긴 위험하다고요! 이럴 때가-”

 

“그만, 여행자. 소란까지 피울 필요는 없잖습니까.”

 

여행자의 외침에 모습을 보인 느비예트는 어딘가 화난 구석이었다.

그러나 그런 느비예트 모습을 보게 된 여행자는 반가운 듯 그에게 다가갔다.

 

“느비예트, 멜모니아궁도 위험해. 이대로 있다간-”

 

“그만해주십시오. 여행자, 뭐가 위험하다는 겁니까?

방주도 예정대로 잘 도착하고 있습니다. 자꾸 소란을 피우면, 저도 도움을 드릴 수 없습니다.”

 

느비예트는 여행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근엄한 말투로 여행자의 소란을 잠재웠다.

 

여행자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약간 놀라 넋이 잠깐 나갔지만,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느비예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느비예트, 내 말이 맞을 땐 너무 늦는다고 이야기했었지?”

 

“...네, 그랬었죠.”

 

여행자는 조용히 왼손에 손을 집어넣어 다시금 시계를 찾았다.

 

파괴된 시계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자는 지금의 시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셋.”

 

여행자는 조용히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

 

분명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지금이라면-

 

“둘”

 

[“쾅-!”]

 

성 밖에서 엄청난 크기의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성벽이 무너졌을 것이다.

 

놈들은 시간을 되돌리기 전보다 약간 빠르게 찾아왔다. 

여행자도 이건 예상 밖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자는 초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여행자, 이건-”

 

“하나.”

 

여행자는 느비예트의 손목을 덥석 잡아 멜모니아궁 밖으로 끌었다.

그 모습은 마치 무거운 검을 필사적으로 휘두르는 대검 기사와도 같았다.

 

느비예트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을 휘청이며 멜모니아궁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의 얼굴엔 당황함이 서려 있었다. 느비예트는 그제야 여행자의 말을 믿게 되었다.

 

“...여행자,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느비예트, 고개 숙여!”

 

여행자는 느비예트의 뒤통수를 오른손으로 끌어 고개를 강제적으로 숙이게 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여행자의 행동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렇게 여행자가 느비예트를 피신시키는 그때-

 

하늘에서 온몸이 불타는 방주가 멜모니아궁 뒤편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젠장, 어떻게든 이렇게 될 운명인가?’

 

여행자는 쏟아지는 먼지를 피해 입을 틀어막고 멜모니아궁 밖으로 나가려 했다.

느비예트도 여행자를 따랐다. 그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아악-!”

 

그들이 무사히 피신한 사이, 무너진 멜모니아궁 안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의 주인은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행정업무원 중 한 명이었다.

 

느비예트는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여행자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돌려 보게 된 멜모니아궁 입구엔 누군가의 상반신이 잔해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살려, 살려주세요-! 아아악-!”

 

잔해 밑에 깔린 남성은 비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의 팔은 꺾이고 꺾여 뼈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훤히 드러난 끔찍한 상처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기 시작하고 있었다.

 

느비예트는 멍한 눈빛으로 죽어가는 그를 쳐다보다, 발걸음을 잔해 쪽으로 옮기려고 했다.

 

“느비예트, 매정한 말로 들릴진 모르겠지만, 이대로 있다간 전부 죽어. 산사람이라도 빨리-”

 

“...여행자, 그럴 수 없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정신 차려 느비예트! 전부 죽어버린다고! 네가 사랑하는 모두가, 흔적도 없이 잡아먹히는 꼴을 보고 싶어? 한 사람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야. 국가 하나의 운명이-”

 

“여행자,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이 정도쯤은 제힘으로-”

 

“전부 죽는다니까!!”

 

여행자의 분노 섞인 대답에 느비예트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여행자는, 어느새 온몸이 붉은빛으로 감싸져 있었다.

 

느비예트는 여행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응당 인간이라면 이때 누군가를 구했을 것이다.

 

그는 인지 부조화를 느꼈다.

 

500년간 나라를 통치하며 이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적이 없었기 때문도 있었지만,

‘인간’이라면, 이때엔 누구나 팔 뻗고 나서서 돕기 바빴다.

 

그런데 눈앞에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던 여행자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여행자의 대답에 순간 얼음이 되었다.

 

“...여행자, 이게 당신의 ‘정의’입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래. 그리고-”

 

여행자는 느비예트의 팔을 다시 끌어 폰타인 성 내부를 직접 보게 했다.

 

폰타인 성 내부는 이미 수계 늑대들이 점령을 시작하고 있었다.

 

온갖 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성 내부의 모든 곳에서 피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느비예트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그만 말을 잃었다.

 

여행자는 그런 느비예트의 표정을 읽었다.

그의 표정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포감’에 가까웠다.

 

“느비예트, 나도 알아. 모두를 구하려고 내 목숨까지 바친 적도 있었어.”

 

“여행자, 그건 무슨 소리-”

 

“미래에서 왔으니까, 잘 들어. 조금 있으면 너와 푸리나는 고깃덩이가 되고 말 거야.”

 

“...그건 왜 이야기를 안 한 겁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무도 안 믿거든.”

 

여행자는 넋이 나간 느비예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행자의 미소를 보며 그 어느 때보다 표정이 어둡다는 느낌을 받았다.

 

“느비예트, 늦지 않았으니까 최대한 도망쳐. 그때까지 내가 막을 테니까.”

 

여행자는 느비예트에게 넌지시 말하며 폰타인 성 내부로 몸을 던졌다.

 

“느비예트, 그 수계 늑대들은 원소 공격이 안 통해. 그러니 최대한-”

 

느비예트는 그렇게 멀어지는 여행자를 막아서려 했지만, 여행자는 그의 손보다 훨씬 빨랐다.

 

“...여행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직-”

 

“크르르-”

 

느비예트는 여행자를 떠나보내며 고개를 돌려 섬뜩한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

 

금빛의 수계 늑대가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속도는 느리지만, 천천히 그를 둘러싸 포위하고 있었다.

 

“...”

 

느비예트는 두 눈으로 주변을 살펴 수계 늑대의 수를 세려던 순간이었다.

 

멜모니아궁의 잔해 속에서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히익-!”

 

수계 늑대는 잔해에 깔린 행정업무원의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다, 

바닥으로 천천히 번지는 핏자국을 따라 코를 킁킁대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느비예트를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내던 수계 늑대도 그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 안돼!”

 

“으아악-!”

 

느비예트는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그의 눈앞에서 사람 하나가 산채로 씹어 먹혔다.

 

찢어진 고깃덩이는 공중으로 피를 흩뿌리며 피의 빗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툭-’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느비예트는 자신의 손으로 얼굴에 묻은 뭔가를 슥 하고 닦아내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붉은 빛의 액체. 분명 그 사람의-

 

느비예트는 눈앞에 끔찍한 광경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장갑에 묻은 검붉은 피를 바라보며, 여행자가 했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수계 늑대들, 원소 공격이 안 통해.”]

 

그는 여행자의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 멈춰 섰다.

한없이 큰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실에 절망했다.

 

“...여행자,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느비예트는 승산을 느끼지 못했다. 

 

여행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것이다.

.

.

.

 

“하아…. 하아….”

 

여행자는 죽일 듯이 몰려드는 수계 늑대를 빠르게 베고 또 베었다.

 

“...내 백성들이….”

 

“푸리나, 고개 숙여!”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지금이라면, 그녀의 뒤로 발톱이 지나갈 것이다.

 

푸리나는 여행자의 대답을 듣고 빠르게 고개를 숙여 늑대의 발톱을 피했다.

그녀의 머리에 쓰였던 모자가 공중으로 떠올라 두 동강이 났다.

 

푸리나는 “툭”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난 모자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히익-”

 

“그대로 있어. 움직이지마.”

 

여행자는 붉은빛의 검을 쉴 새 없이 휘둘렀다.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여행자의 검을 쥐었다. 검은 평소보다 날렵하고 가벼운 느낌이었다.

 

여행자는 푸리나의 뒤에 서 있던 수계 늑대를 순식간에 베어내었다.

금빛의 피는 하늘로 솟구쳐 푸리나와 여행자를 더럽혔다. 

 

여행자는 이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생각했지만, 

‘다른 루트’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미래가 눈 앞에 펼쳐질 것이란 걸 알았다.

 

이제부터는 순전히 운의 몫이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여기서 끝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나?”

 

여행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남은 수계 늑대가 얼마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놈들까지 처리하면-”

 

‘두근-’

 

여행자는 검을 다시 고쳐 쥐다, 

갑작스레 자신의 뒤에서 알 수 없는 힘이 고동하는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잠깐.”

 

소름 돋을 정도로 익숙한 느낌이다.

 

여행자는 순식간에 이 고동의 출처를 알아냈다.

여행자의 눈은 어느새 주춤거리며 서 있는 푸리나에게로 맞춰져 있었다.

 

‘분명히 이 고동 어디선가 느껴봤는데, 어디였지?’

 

여행자는 푸리나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분명 같은 크기의 힘은 아니었지만, 느낌은 똑같았던 이 고동.

 

“...왜? 여행자, 뭔가…. 문제라도 있어?”

 

푸리나는 갑작스레 뚫어지라 쳐다보는 여행자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행자도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위화감에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고동, 이 느낌, 어디서 느껴본 적이 있어. 분명-’

 

여행자는 순간 고동의 근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었다.

 

이 고동은 여행자가 시간을 여러 번 돌리기 전에 처음 느꼈던, 

회중시계에서 나오던 고동의 느낌과 같았다.

 

“설마…. 그럼, 내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가-”

 

“아까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푸리나는 알 수 없는 이야기만 반복하는 여행자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으나,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빛은 그녀에게 당황감을 주었다.

 

그렇게 여행자가 최악의 상황을 짐작하던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그 둘 옆의 골목 속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행자. 시간을 돌릴 방법이 있습니다.”

 

“...어.”

 

정말 보기 싫었던 사람.

 

혹시나 하는 마음에라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던 그 사람.

 

청년이 골목 속에서 여행자와 푸리나의 말을 엿들으며 굽어진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나왔다.

 

여행자에게 있어 그의 모습은, 어둠을 비집고 나온 사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지?”

 

설마 하는 생각에 여행자는 자신의 결론이 먼저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서없는 이야기였지만, 청년은 여행자의 대답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여행자? 이 사람은 누구…?”

 

잔뜩 긴장한 푸리나가 공포에 온몸을 떨고 있는 여행자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여행자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듣고 싶어도 공포감이 귀를 먹먹하게 좀먹고 있었다.

 

“여행자, 시계 속에 담겼던 그 힘…. 그 힘의 원천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설마.”

 

“...짐작하는 대로라면, 맞습니다.”

 

푸리나는 영문모를 대답을 해대는 그들이 순간 두려워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내 이야기를 무시할 정도로 심각해진 거지?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늑대들이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저 둘은 무슨 생각을-

 

“...그래, 그럼 그 원천은 어디 있는데?”

 

여행자는 설마 하는 생각에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물론 결과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여행자의 불길한 예상은 점점 맞아갔다.

 

청년은 손가락으로 힘의 원천을 천천히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일수록 여행자의 마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단한 마음속에 큰 균열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대며 울려 퍼졌다.

 

“...아니야, 잘못 본 걸 거야.”

 

“여행자, 힘의 원천은…. 바로-”

그의 손끝이 가르친 건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리고 여행자는 문득, 

그의 손끝을 바라보며 그가 이전에 자신에게 속삭였던 사실 하나를 기억해냈다.

 

[“시계에는, ‘먹이’가 필요합니다.”]

 

“...아니야, 말도 안 돼. 분명 시계는-”

 

“...시계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 안에 있는 힘이 진짜죠.”

 

여행자의 표정은 어느새 창백해졌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으, 그…. 그러니까-”

 

여행자는 왼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격해지는 두통에 고통스러워했다.

점점 생각이 뒤죽박죽되어갔다. 더 이상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멍해져 갔다.

 

“...그러니까, 그 말은, 푸리나가-”

 

힘겹게 입술은 뗀 여행자의 입은 파르르 떨렸다. 

어지러운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애쓰고 있었다.

 

그런 여행자의 태도와는 다르게, 

청년은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여행자의 대답을 맞받아쳤다.

 

“...[시계]가 된 겁니다.”

 

“어…. 째서? 왜? 그때 분명 시계는 파괴되었을 건데….”

 

“지금 당신이, 바로 여기 있잖습니까.”

 

“...”

 

그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여행자는 그의 대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푸리나는 여전히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변해가는 여행자의 표정을 바라보며 점점 자신도 두려움에 잠식되어 감을 느꼈다.

 

푸리나는 이대로 있다간 자신도 두려움에 잡아먹히리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 수초 내로 목숨이 오가는 이 지옥 속에서, 

감정에 잡아먹히는 건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다.

 

그녀는 용기를 냈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푸리나는 어느새 그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서로 한가하게-”

 

결국, 그녀는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눈앞의 여행자와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 소리쳤다.

평소다운 그녀의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 속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섞였다.

 

“...푸리나 씨.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그녀의 대답을 들은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푸리나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뭔데? 갑자기….”

 

“폰타인과…. 여행자를 위해 희생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