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날 보기로 했는데

그 주 내내 잠이 제대로 안오더라. 새벽 두시 세시만 되면 식은땀 흘리면서 깨고.

시험기간 겹치고, 이번엔 들이받아야지 하던 부담이 있었나봄.

토요일이 되고, 점심 좀 지나서 만났음.

당구 한게임 하고.
낮부터 치맥조지고.
치킨 먹는데 이뇨속이

'가방 뭐냐.'

술이랑 잠옷이다.

'술 머 가져왔냐.'

그때 먹다 남은 비싼거랑 이것저것 있다.

'함 보자'하면서 가져가는데

아앗...

비싼 술 병목에는 팔찌가 감겨있음...

중학교 졸업할때 같이 만든 우정팔찌.
고등학교 가서 잃어버렸다길래
내가 부랴부랴 똑같은 디자인으로 의뢰해서 만든 팔찌.

딱 보더니.

'어. 어어어'

아 쒸...

'야 이런... 이 발칙한 자식. 기특한 자식.'

허허...

'야 이런게 있었으면 못열게 해야지.'
'물론 말려도 안듣겠지 내가.'

말한다고 말겠냐고

'ㅋㅋㅋㅋㅋㅋ'

이랬음.

좀 싫어하려나 어쩌려나 했는데 진심으로 좋아하더라. 너무 기뻤음.

다음에 여기 또 오면 뭐 먹어보자 그런얘기하면서 닭 한마리로 맥주 인당 1000cc 해치우고.

피시방 가서 배 좀 꺼트리고.
장보러가서 고기랑 이것저것 사들고.
걔네 집으로 갔음.
자취방 말고 본가.

부모님 안계시다고 아싸하고 부르더라.
오랜만에 가보니까 느낌 이상했음.

고기사온거, 내가 사둔 좋은 술. 냉장고에 넣어두고.
영화틀어놓고 잠깐 얘기나누면서 쉬었음.
치맥을 애매한 시간에 조져서 바로 먹기가 좀 그렇더라고.

그러고 고기 구우면서  짠.
나보고 여자친구는 언제 만들거냐는데...하하...
공대라 다행이지. 졸업학년인데 과에 여학생이 하나도 없다. 어느 틈에 하겠냐 하니 수긍하더라.

먹으면서 언제말하지, 언제말할수있지 했는데
근황얘기하면서 시덥잖은 얘기로 웃고 떠드는 그 얼굴이 너무 좋더라.
그래서 함부로 끊고 내 이 얘기를 할수가 없더라.

밥도 다 먹고.

디저트 와인 사둔거 꺼내서 간식거리랑 먹으면서 영화 한편 더 봄.
중간중간 둘다 폰도 보고 영화말고 다른 얘기도 하고 그랬음.
이번엔 비혼주의냐도라.

나도 손주 옹알이는 들어봐야 할거 아니냐. 그러는 너는, 지금 여자친구랑 결혼할거냐.

'그렇다.'

옹. 좋겠다.

'애 생기면 우리애 삼촌 해조라.'

내 주변 커플들 다 그얘기 한다.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뭐 그런 얘기 하다 보니 영화가 끝남.

유튜브 틀어놓고 술 남은거 조지면서 계속 얘기했는데.

글쎄다.

도저히 말을 못꺼내겠더라.

어떤 새끼가 와인엔 사랑의 마력이 있다는둥 헛소리 했는지 모르겠다.
난 또 그걸 어디서 주워듣고.

도무지 모르겠는 와중에, 알딸딸해진 나를 고놈이 재우더라.

자기 방 내주고, 자기는 부모님방에서 자더라.

빈말로라도 같이자자, 일단 누워봐라 아 안되겠네 한번 해주지.

내가 해볼걸.

쉽지않더라.

하여간 또 사방천지 걔 냄새에 휩싸여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날 해 뜨니까 부모님 언제 오실지 모르겠다고, 호다닥 내보내더라.

제법 멀리까지 배웅나와줌.

난 바로 집으로 안가고 잠깐 어슬렁 거리면서

근처 시냇가로 갔음.

물가로 쌓아둔 돌 계단 참에 앉아서 한참을 물 흐르는걸 봤음.

거의 30분은 그러고 있었을거임.

더 나은 사람이 되서 커밍아웃하고 고백하고 그럴거라고 했지만은.
하루라도 어릴때, 돈독할때 들이받고싶었음.

이번주는 너무 힘든 한주였고, 조금은 편해지고 싶었다. 너무 이기적이지만.

전화기를 들어서 번호를 누름. 연락처 찾을 것도 없지. 외우고 있는걸.

그러고 걸었는데. 말을 못하겠더라.

그래서 둘러댔다. 어제 영화본 usb 혹시 tv에 꽂혀있냐고.

사실 잘 챙겼으면서.

그러고 없다는 너한테

아 그러면 됐다. 챙겼는지 안챙겼는지가 가물가물하더라. 어디에 둔건지 알거같다.

그리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한참을 더 앉아있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집에 혼자냐.
목소리가 왜 그래. 누워있네 이뇨속.
그럼 잠깐 얘기 좀 하자. 시간 괜찮냐.

'괜찮다'

말을 할까 말까 되게 많이 고민했다.
그러니까 부탁 하나만 하자.

도중에 화내거나 말 끊지 말아달라.
못들은척하거나 안들은걸로 하겠다 하지 말아달라.

'알았다'

안하는게 맞을거같은데, 평생 숨기고 살것도 아닌거 같다.
니 내 남자도 좋아하는건 얼추 알지 않으냐.

'어?'

어?
몰랐어?

'몰랐는데'

에헤이...
그럼 내 니 좋아하는건?

'뭐?'

아이고

'전혀 몰랐는데'

내 중학교때 00이 좋아하고 그랬다 아이가

'그건 아는데 걍 친구로 좋아하는건 줄 알았지.'

그렇게 앵기는걸?

'컨셉인줄'

야이... 아니 이런 얘기 할려는게 아닌데...
니 내한테 이런거 막 선그은적도 있다아이가.
하트뿅뿅 이모티콘 날리니까 화내고.
니랑 절대 그럴 일 없다 그러고.

'남자끼리 뭐 그런걸 보내냐는거였지'

아이고... 난 중간중간 선긋길래 얼추 아는줄 알았지...

'모르지. 몰랐지.'

말걸그랬네... 얼추 아는거 같아서 말하고 편해지고 싶었던건데...
도둑이 제발저려서는...

'그래서 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하고싶은대로 해라. 근데 부탁 하나만 하자.

'해라'

팔찌. 버리는건 괜찮은데,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말아달라.

'내가 그걸 왜 버리는데. 괜찮다. 고맙다 그거는.'

그래서 음... 뭐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당황스럽다니까. 근데 니가 남자인 친구가 없는건 아니잖아.'

아무한테나 이러겠냐고...

'그런 감정이랑 별개로 친구 할 수 있다.'

고맙다...

여튼

'응?'

니가 선을 좀 그어도.
 말하는것까지만 생각했더니 뒤는... 뒤는 잘 모르겠다.
거리감같은거.

'근데 나는... 지금 여자친구도 있고... 여자친구 아니더라도 니를 친구로만 봤다.'
'나 니랑 진짜 친하잖아. 부산오면 니만 보는데. 끽해야 ㅁㅁ이.'
'계속 편하게 볼려면, 니가 조금만 단도리를 좀 해도.'



'이기적인 말인데... 좀 그렇잖아.'

아니다. 할 수 있는 말이다. 미안하다.

'그래 좀 미안해하고.'
'난 진짜 몰랐어'
'ㅇㅇ이 따라다니고 그것도 다 컨셉인줄알았지.'

반은 진심이지...
근데 진짜 몰랐나.
니 내 폰 까고 막 하면서 남자들 몇번 나오고 그랬었는데.

'몰루아'
'만화 아니었나?'

고등학교땐가 아무튼...
아무튼 아유 이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려서는...

나중에 먹은거나 정산해서 보내라

'어 그래.'
'들어가라'

미안하다...

'응'




그러고 그자리에서 울었다.

처음본 날부터 11년.
좋아한 해로부터 7년.
한순간에 다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드러냈다는 후련함.
정말 몰랐을까 하는 의심, 불안.
말하지 않았더라면 숨겨졌을까 하는 후회.
이대로 연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너무 무겁더라.

다다음주인가 한번 부산 더 온다는데.

부디 그때 불러주기를.

지난 10년이 저 10분으로 사라지진 않기를.

언젠가 내가 여자친구든 남자친구든 생기거든 웃으며 보일 수 있기를.

염병할 새벽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