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XWjqANJtmM


듣고 부르면 더 좋을거임.


오늘따라 사람이 없는 서클 카페 앞.

결연한 그의 눈빛과 그가 다른 여자와 만나는거 같다며 치사토가 건네준 사진을 본 아야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와는 이것이, 이 만남으로 끝이라는 것을.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 가서 직원에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아야는 그를 붙잡을 생각없이 가만히 그가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너무도 믿을 수 없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그가 나지막히 웃으며 전한 마지막 한 마디.


" 이제 나 말고 딴 사람이랑 같이 놀러다니고 그러면서 좋은 추억 쌓아. 나도 딴 사람이랑 좋은 추억 쌓을게.

지금까지 재밌었고, 나같은 사람이랑 사귀어줘서 고마웠어. 1년동안 서로 싸우고, 욕하고, 즐거웠던 거, 다 버려두고 새출발하길 바래.

절대 네가 싫증나서 그런건 아니야. 난 먼저 일어날게. 그동안 참 재밌었어. 그리고... 미안해. "


아야에겐 눈길도 안주고 떠나는 그를 보며 아야는 조용히 남은 커피를 홀짝이고 연습실로 향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는 그저 다른 여자가 생겨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나쁜 놈이니까


그 후로 아야는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볼 새도 없었다.

아야가 속한 그룹인 파스파레가 드디어 궤도에 올라 라이브에 예능 출연 등등 수많은 스케쥴을 소화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수하던 아야는 문득 거울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짓궂게 클렌징폼이라며 생크림을 묻히며 가볍게 장난치던 그는 이제 없다.

새삼스레 그 사실을 알자마자 아야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아야는 당황하며 눈물을 닦아내었지만 한번 흐른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간신히 진정하고 나서 아야는 생각했다. 그는 왜 갑자기 자기가 싫어진건지.

그간에 그와 찍은 사진과 영상은 아주 거짓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가 생긴 거라고, 그냥 그와 자기 사이는 죽어도 안될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뭔가가 걸렸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이를 밝혀줄 그는 몇번인가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질 않는다. 요즘엔 아예 폰이 꺼져있다.


그러나 이젠 그와 헤어진 날로부터 1년이나 지났으며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와는 완전히 끝났고, 아야도 이를 알기에 그저 바랄 뿐이었다.

이러한 생각의 마지막엔, 그를 저주하거나 미워하지는 말자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빌어주자고.

그를 미워해야 돌아오는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


" 방붕 씨. "


조용한 카페에서 슬며시 사진 한장을 건네는 치사토.

바라보니 병원을 나서는 내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 아야가 당신 모습 보기 힘들다며 불안해하니까 손을 좀 썼어요.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말해야 할까. 하지만 이런 사진을 찍고, 나를 불러내 은근히 압박을 넣는데 발뺌해봐야 소용없겠지.

그간 그녀를 뜸하게 만났던 이유를 털어놓았다.


"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지병이 악화되서 앞으로 고작해야 2달정도 산다네요. 아야한텐 비밀이에요. "


" 하지만...! 나중에 아야가 알게 된다면...! "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바짝 얼굴을 내미는 치사토.

아마 그녀가 알게 된다면 엄청 울겠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알아서 좋을 것 없는 사실도 있으니까.


" 파스파레가 궤도에 오르려는 지금, 이런 안좋은 사실이 아야 귀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지는 알죠? "


치사토 또한 어떻게 될지 매우 잘 알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치사토 씨가 원하는건 대충 알거 같아요. 괜찮아요.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테니까. 대신 저도 부탁 하나만 할게요.

아야에게 제가 바람피는 거 같다고 얘기좀 해주세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치사토 씨가 하는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잖아요? 저는 이만 먼저 일어나 볼게요. "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하려는 나를 치사토가 붙잡았다.


" 방붕 씨. 제가 원하는게 새로 생겼는데, 뭔지 알 거 같아요? "


" 네. 고쳐볼게요. 이렇게 딴 사람에게 쉽게 일을 떠넘기는 이 성격. 하지만 나쁘진 않을 거에요. 리더가 흔들리면 결국엔 그룹도 흔들리는 거니까.

커리어에 오점이 남는 거보단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을 나쁜놈 만드는게 치사토 씨에게도 편하죠? 아야는... 이런 내 모습, 봐서도 안되고 알아서도 안돼요. "


아무말 없이 치사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순조로웠다. 바로 며칠 뒤에 그녀를 서클로 불러내어 이별을 통보한다.

.그녀가 내가 남긴 마지막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말이란건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니 잘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파스파레가 점점 인기가 많아질수록, 약국에서 처방받는 약은 많아져갔다.

그리고 몰래몰래 라이브에 가서 응원가는 날도 줄어들어 갔다. 그녀에게 있어 나는 딴 여자랑 바람난 놈으로 방송에 나왔으니까 이러면 안될텐데, 그래도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그녀의 라이브에 가게된다. 그녀의 앞날에 행복을 빌어주고 싶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멀리서 그녀가 해맑게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따라부르게 된다. 자신은 재능이 없다 생각하지만 이런 점에서라면 그녀는 재능이 넘쳐난다.


그녀의 라이브를 몰래 보고나서 집에 돌아온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발과 무척 즐겁게 노랠 부르던 그녀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날후로 안울겠다 다짐했지만 끝끝내 참다가 결국 흘러내리고 만다.

그녀와의 지난 추억을 떠올리다 지금 이렇게 벽에 기대서 한기에 벌벌 떠는 내 모습과 비교하니 참으로 초라하게 느껴진다.


뱃속에서 올라온 무언가를 토해내고 바닥에 쓰러진 순간, 나는 직감했다.

이제 더는 라이브를 보러 갈 수 없고, 지금 눈을 감으면 다시는 못 뜬다는 것을.


그래도 후련했다. 모든 걸 토해내 속이 편안해져서 그랬을까.

점점 눈이 감기면서 내가 바란 소원은 하나였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나에 관한건 잊고서 꽃길만 걷기를.

벽에 걸린 파스파레 전단지를 보는걸 마지막으로 내 눈은 감겼다. 오늘따라 바닥이 유난히 차가웠다.


방붕과 만난뒤로 3개월이 지나고, 치사토는 그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이미 매니저에겐 따로 만날 사람이 있다고 전해두었고, 파스파레 연습에 합류하기까진 시간이 있다.

계단을 오르며 치사토는 그 날을 회상했다.


그 날, 방붕이가 먼저 일어난 자리엔 열쇠와 쪽지가 놓여져 있었다.

카페 문을 열고 나간걸 확인한 후, 치사토는 반쯤 확신했다. 일부러 두고간 거라고.

쪽지를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 제 자취방 열쇠에요. 3개월 뒤, 제 자취방에 혼자서 와주세요.

xx주택 10동 901호 입니다. 가서 제 마지막 흔적을 거둬주십시오.

제 흔적은 간직하셔도 좋고, 그 자리에서 버려도 됩니다. '


엘리베이터의 소중함을 깨닫고 방붕의 자취방 앞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치사토를 불렀다.


" 방붕이 형 찾아온거에요? 아마 방붕이 형 없을건데... "


문틈 사이에 체육복 차림으로 얼굴만 빼꼼 내민 남성.


" 방붕 씨에게 부탁을 받아서 찾아왔어요. 마지막 흔적을 거둬달라 해서... "


남성은 가만히 치사토를 바라보더니 문을 열고 나와 치사토 앞으로 다가간다.


" ...청소는 다 해두었으니까 냄새는 안 날 거에요. 어차피 그 후로 계약하는 사람도 없어서 흔적은 그대로 남겨뒀거든요.

자기 죽고나면 사람 하나 찾아올테니 잘 청소해두라 그랬는데, 해두길 잘했네요. "


어딘가 마야를 닮은듯한 남자는 그 후로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팬이라면서 달려드는 부류보단 낫다싶어 바로 901호 앞에 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체적으로 말끔했다. 남자가 말한대로 생전에 방붕이 쓰던 가구나 생활용품, 굿즈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리저리 안방이나 다른 방에 들어가보았지만, 흔적이라 할만한 건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책에 끼워두었을까 싶어 책을 펼쳐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흔적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생각에 잠긴 치사토는 문득 현관문 왼편에 붙여져 있던 전단지를 생각해냈다.


' 등잔 밑이 어둡다는건 바로 이걸 두고 말하는 거였어. '


즉시 현관문으로 가서 반듯하게 붙여진 전단지를 조심스레 뜯어 살펴보았다.

디자인으로 미루어 봤을때 립싱크 사건 이전에 나온, 지금은 얻기 힘든 타입이며 각 멤버 사진 아래에 적어둔 메모에서 파스파레에 대한 애정이 돋보였다.

치사토는 적힌 메모를 찬찬히 읽다가 아야 사진 아래에 있는 것까지 읽고서는 혹시나 싶어 전단지를 뒤집어보았고,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 아마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누구에게 보여주기도 부끄러워서 지병이 더 악화되기 전에, 여기에 짧게 글을 쓸게요.

아야, 밥은 잘 먹고 다녀? 긴장하면 실수하는 버릇은 좀 나아졌고? 히나한테 많이 이런 점으로 지적받겠지만, 너라면 잘 이겨낼 수 있을거야.

사실은 쭉 네 옆에만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어. 멀리 가봐야 하거든. 그래서... 미안해.


이런 어두운 얘기 말고 이제 밝은 얘기를 좀 해볼까? 밥 잘먹고, 딴 사람이 손가락질 하고 욕하는거에 신경쓰지 마. 신경써봐야 너만 힘들어져.

연습생부터 쭉 해온 것처럼 한발자국,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와 지낸 추억은 저 멀리 두고서 새 사람 만나. 곧 떠날 사람 생각해서 어쩌겠어. 아프지 말고, 잘 지내.


추신. 아야에겐 비밀로 하고싶지만... 보여줘도 꿈에 나타나거나 그러진 않겠습니다. 유품을 어떻게 할지는 결국 산 사람의 마음에 달렸으니까. '


치사토는 말없이 그 전단지를 곱게 접어 핸드백에 넣은 후, 자취방을 나섰다. 바깥에 나서는 순간 비가 내렸지만 매니저가 우선을 씌워주어 크게 젖지는 않았다.

연습실에서 아야를 본 치사토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아야를 따로 불러내 전단지를 보여줬다. 방붕에게 지병이 있다는건 알리지 않았다.

전단지를 붙잡고 그의 이름을 되뇌이며 우는 아야를, 치사토는 꼭 끌어안았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끌어안았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 속에서, 아야의 구슬픈 울음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이젠 하라하면 적응이 안되서 못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글 올리고 싶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