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피폐물이 아니라, 꿈도 희망도 없는 지옥에서 끝없이 헤매는 잔인한 이야기가 보고 싶다.

로도스를 잃은 박사가 이샤믈라에게 의탁하는 거라던가.

강대국 간의 알력다툼에 의해 풍비박산이 난 로도스. 황제의 칼날에 의해 아미야가 죽었고, 켈시는 우르수스로 잡혀갔지. 나머지 오퍼레이터들은 추격대로부터 박사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고.

꿈도, 동료도, 사랑도, 모든 것을 빼앗긴 박사는 홀린 듯 바다를 향해 걷는 거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저 망령처럼.

그렇게 쇠해 가는 육신을 질질 끌고 먹구름 진 이베리아의 해안에 도착한 박사.

불온하게 일렁이는 바다 한복판에서, 긴 꿈에서 깨어난 해신이 박사를 보며 눈웃음쳐. 인간의 기준으로는 재단하기조차 버거운 친애의 정을 담아서.

너무도 오래 기다렸어, 박사.

내 혈족이 되어줘.

그리고 박사는 앙상하게 마른 팔을 그녀를 향해 뻗는 거지.

될게, 이샤-믈라.

너와 피로 맹약을 맺고, 너의 일부가 되어 영원토록 살아갈게.

그러니 부탁해.

이제 전부 부숴줘.

체념과 분노를 담은 박사의 말에, 이샤믈라는 환하게 웃겠지. 드디어 박사가 바다를 품어 주는구나. 파도의 아름다움을 알고, 물거품의 일부가 된다는 숭고함을 이해해 주었구나. 기뻐. 한순간의 미소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 환희를 담아, 고요히 만가를 부르기 시작하는이샤믈라.

그 노랫소리에 물결이 몸을 일으키고, 풍랑이 몰아쳐.

오래 침묵했던 바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육지를 굽어보며.

이샤믈라가 박사를 향해 손을 뻗겠지.

응, 박사. 함께 전부 집어삼키자.

그렇게 시본이 되어, 생전의 지휘 능력과 이샤믈라를 향한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박사가.

억겁의 시테러를 이끌고 테라를 부수는 이야기가 보고 싶어.

아, 링.

링 박사 피폐물도 정말 맛있을 거야. 쉐이 애들 쪽에 피폐물에 특화된 설정이 은근히 많거든.

파편들은 언젠가 쉐이의 일부로 환원되어 소멸할 운명이라거나, 쉐이의 파편이 죽으면 그 쉐이의 존재가 점점 지워져 간다거나 하는 거.

서로의 모든 것을 바쳐 마음껏 사랑한 박사와 링.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은 끝을 맞이하고,  링은 순리에 따라 소멸하겠지.

박사에게 부디 행복해달라는 한 마디만 남긴 채.

자신의 반쪽을 잃은 박사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 가.

끝없이 절망하고, 무수한 밤을 눈물로 지새울 거야.

삶의 의미나 다름없었던 링의 모든 것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는 공허함.

한때 자신과 하나였던 그녀를, 자신도 모르게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끝없이 가슴을 에여 와서.

자기도 모르게 책상 위의 페이퍼나이프를 잡고 몸 곳곳에 링을 새기는 거야.

그녀의 이름, 자신을 부를 때의 상냥한 말투, 좋아하던 술이나 음식의 종류, 함께 피워냈던 색색깔의 추억까지.

피범벅이 된 몸을 거울에 비춰 보고 안도하며,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닦아내면서 몇 번이고 되새기는 거지.

잊지 말라고.

한때 목숨보다 소중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하지만 상처가 아물어 갈수록, 추억도 빛이 바래   가.

링의 냄새. 맑은 웃음소리. 몇 번이고 덧그렸던 두 사람의 미래가 점점 박사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가고.

그 저주스러운 망각에 저항하려는 것처럼, 발작하듯 상처에 앉은 딱지를 뜯어내며 오열하는 박사가 보고 싶다.

네가 내게 주었던 사랑은 아직까지도 날 아프게 하는데.

나는 이제 그 사랑을 추억하는 것조차 할 수 없어.

환하게 타오르던 불꽃은 온데간데없고, 성마른 재만이 남아 내 안에서 끊임없이 휘돌고 있단 말이야.

왜야, 링. 왜 내게 행복하라고 한 거야.

너는 내 봄이었고, 가을이었어. 내 행복은 이미 오래 전에 네 존재로 대체되었단 말이야.

그런 네가 이제 없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어?

절절하게 통곡하는 박사였지만, 곧 그 아픔조차 점점 무뎌져 가.

온 몸에 새겨진 흉터의 의미가 퇴색되고.

얼마 안 가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온 박사.

하지만 불을 꺼트려도 재가 남듯, 링의 그림자는 여전히 박사 안에 숨죽이고 있었지.

그리고 누군가 뭔가 잊은 거 없냐며 상기시킬 때마다 살며시 고개를 쳐드는 거야.

잊어버린 게, 있었구나.

정말 소중한 것이 있었는데.

내 목숨을 대신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던 누군가가 곁에 있었는데.

그 사랑의 잔재가, 아직도 내 안에 이렇게 선명한데.

난.

왜.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온 몸에서 힘이 빠지고, 이미 말라 버렸을 터인 눈물샘에서 새로운 눈물이 흘러 떨어져.

그렇게 무언가를 잊었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 무너져 통곡할 정도로, 점점 망가져 가는 박사가 보고 싶다.

그런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가슴 아픈 이야기가 읽고 싶구나....

하 시발 독타 개꼴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