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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언이라기보다 저주에 가까운 험한 말을 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사리아와 로렌티나, 모두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박사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말보다 독한 악담이었다.


그랬기에 박사가 자신의 사과를 차갑게 무시하더라도 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사의 반응은 그녀의 생각보다 아득히 덤덤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평이한 그의 말투에, 조금 놀란 글래디아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응. 말했잖아, 나도 가끔 그런 생각 한다고. 게다가 있지, 입에 욕을 달고 사는 내가 누구 말실수 가지고 뭐라 한다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잖냐.” 



진심으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그의 태도에, 글래디아는 속으로 찬탄했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에기르가 아예 박살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면, 글래디아는 그 날로 로도스를 박차고 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당신의 너그러움에 찬사를 바칩니다.” 



자신도 모르게 바다의 오래된 인용구를 꺼낸 건, 아마 그래서였겠지. 


그런데 박사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로렌티나한테 들었었는데. 이럴 때 뭐라고 하더라.” 


“...?” 


못 알아듣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대충 눈치 봐서 알아먹고 적당히 대답하는 것도 아닌.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 고민하던 그는, 이내 서툰 에기르어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당신의, 찬밥? 아니, 찬사가 곧 제 영면, 아니 영광입니다.” 


“...박사님, 당신. 에기르어를 하시는군요.” 



그 사실에, 그녀는 경악하고 말았다. 


육지에서 에기르어는 이미 그 명맥이 끊겨 가는 사어. 


육지에 정착한 에기르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잊어버렸기에, 이를 구사하는 사람은 켈시를 비롯해 손에 꼽았다. 


육지의 언어 체계와는 많이 달라서 습득 난이도도 굉장히 높은 편이었고. 


그런데 박사는 불완전하게나마 그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박사가 쑥스럽다는 듯 뺨을 긁었다. 



“조금. 예전에 켈시한테 좀 배우다 말았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계속 연습하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 이제 로도스에 에기르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고 해서. 가끔 에기르어 써 주면 로렌티나도 되게 좋아하고.” 


“...그런데 왜 지금까지 저에게는 한 마디도 안 하셨던 겁니까?” 


“굳이? 너 나 싫어하잖아.” 



…확실히. 


몇 달 전의 그녀에게 박사가 에기르어로 말을 걸었다면, 아마 그녀는 분노했을 것이다. 


이 천박한 미물이 감히 자신들의 고귀한 언어를 흉내내려 한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뇨. 아닙니다. 저는 더 이상 박사님을 싫어하지 않아요.” 



이제는 안다. 


박사는 겉이 조금 그럴 뿐, 알맹이는 누구보다 꽉 들어찬 남자라는 걸. 


오히려 지금은 에기르어를 배우려고 노력한다는 그의 말이, 자신들에 대한 존중으로 느껴져 조금 기쁘기까지 하다. 


그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렸고.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있었던 글래디아였다. 



“에기르어 연습도, 저와의 관계도…부디 긍정적으로 재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검토? 구체적으로, 어떻게?”  


“저는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난색을 표하는 박사. 


그럴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사적인 인간관계에 서툰 글래디아는, 달리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저는 육지가 싫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야만적이고 천박한데, 폐에 헛바람만 잔뜩 들어가 있는 하등생물 집합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냐?” 


“예. 그 하등생물 중에서도 당신은 최악이었습니다.”   


“......” 


“경박하고, 껄렁껄렁한데다 입에는 걸레를 물고 있는. 품위도 예절도 교양도 해사보다 나을 게 없는 인간 말종이라고 생각했죠.” 


“...싸우자고?” 



지나치게 솔직한 심경 고백에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박사. 


그러나 하는 말과는 다르게, 그의 입가에는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속을 털어놓는 글래디아를 독려하듯. 



“그런 당신이 싫었고, 제 부하가 당신과 어울리는 것도 참아 주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민폐도 많이 끼쳤죠.” 


“응. 그래서?” 


“하지만…그렇게 싫다 싫다 하면서도 계속 지켜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당신의 좋은 점들이.” 



더러운 입버릇 아래 숨은 강인한 의지와 부지런함도. 


늘 일그러져 있는 표정에서 은은히 배어나는 상냥함과 배려심도. 


자신조차 모르는 새에 점점 깨닫게 되었다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는 글래디아. 


박사는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안에서 당신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네, 너한테 고평가받을 만한 짓은 한 적 없는데.” 


“아뇨.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타인을 감복시킬 만한 행동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뜻이니까요.” 


“...어, 고맙수다?” 


“예. 저 또한 자연스럽게 당신에게 호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 당신이니까, 에기르의 미래를 함께 짊어져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요.” 



하지만 호의를 품는다는 건, 대부분 상대방에게 어떤 기대를 한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항상 자신에게 좋은 측면만 보여주기를 희망하는 그런 종류의 기대. 



“아까 저에게 물어보셨었죠. 당신께 뭘 바라고 그렇게 화를 낸 거냐고.” 


“그랬었지.” 



글래디아가 박사에게 바랬던 건 책임감이었다.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 걸맞는 책임감. 


하지만 연인이 있는 그가 무책임하게 자신의 부하에게 손을 댔다는 걸 안 순간. 


그녀는 순간적으로 배신당한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 



“어이없는 짓이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신뢰한다는 표현 한 번 한 적 없으면서, 자기 혼자 멋대로 배신당했다고 역정을 내다니. 마음껏 비웃으셔도 됩니다.” 


“...음. 좀 그렇긴 한데, 나도 잘한 건 없으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멍청한 건 저였습니다.” 


“글쎄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사실 나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거든.” 


“그러십니까. 제 생각은 좀 다르지만, 판단은 당신 몫이니까요.” 

 

  

어쩐지 첫 만남 때가 생각나 피식 웃은 글래디아는,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박사를 바라보았다. 



“박사님. 정말 죄송했습니다. 비단 오늘 일만 놓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당신을 은연중에 깔보고 무시했던 것, 전부 여기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에기르는 어디로 갈까. 


그리고 자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꿈 속에서 퍼스트본이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글래디아는 아직 찾지 못했다. 


아니, 찾으려는 시도조차 안 했다. 


자신이 알던 조국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과거에 매몰된 채 미래를 거부하고 있었을 뿐.


그냥 하등한 육지에 에기르를 되찾을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걸 수도 있고. 



“그리고, 너무 늦었을지는 모르겠지만…지금부터라도 박사님과 제대로 된 신뢰관계를 쌓고 싶습니다. 로렌티나처럼요.”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안다. 


육지가 에기르에 비해 야만스럽고 저급할지는 모르나….


이곳에는 바다를 원래대로 되돌릴 답이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만한 전사들이 있었고.  


도저히 풀 수 없어 보이는 난제를 풀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현자들이 있었으며. 


길 잃은 낭인들을 이끌 만한 지도자가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옛 영광만을 붙들고 있는 건 무의미했다.  


다시 헤엄칠 시간이었다. 


그런 글래디아의 결의를 담은 말에, 침묵하던 박사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일단, 용기 내줘서 고맙다. 자존심 버리고 이렇게 찾아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아닙니다. 저야말로 긴 이야기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그리고 나도 미안했어. 지휘관이란 놈이 먼저 다가가지는 못할망정, 소인배마냥 기싸움이나 하고.” 


“왜 사과하시는 거죠. 제가 그렇게 무례하게 굴었는데도 박사님은 저를 챙겨 주려고 항상 노력하셨잖아요.” 


“아니, 그거랑 그건 좀 다르지.” 


“...흠. 그 이야기도 좀 신경쓰입니다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죠.” 



정말 선한 사람이구나. 


꽤나 오래 냉전을 치른 사이인데도, 이런 말 몇 마디에 바로 경계를 풀고 다가오다니. 


때때로 전장에서 선함은 곧 죄악이 되곤 한다. 


하지만 글래디아는 이미 몇 번이고 직접 보며 느꼈다. 


박사는 선해도 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누구보다 잘 구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애초에 여자 문제만 아니면 대체로 칼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라서 글래디아가 인정한 거다. 



“지금은 부디 대답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독기가 빠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박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짓는 글래디아. 


그리고 박사는 글래디아가 용기 내 건넨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야, 이거 되게 무안하네. 그래. 친구 먹자, 소드피쉬야.” 



흔쾌히 승낙하는 박사의 목소리가 너무 가벼워서, 도리어 글래디아는 조금 놀랐다. 


“...예.”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아뇨, 생각보다 너무 쉽게 받아 주셔서요. 미움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너 싫어한 거 맞는데? 오만하지, 뭔 말만 하면 비꼬지, 나름대로 챙겨주려고 해도 날 선 반응만 하지.” 


“......” 


“근데 언제까지고 그렇게 지내기는 또 싫었어. 누구 미워한다는 게 생각보다 되게 피곤한 일이잖냐.” 


“그렇죠.”


“근데 너랑 어떻게 말을 터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로렌티나한테 상담해볼까 싶던 차였는데….” 


“소드피쉬가 느닷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런 겁니까.” 


“바로 그거야.”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박사. 



“뭐 지난 일이야 어쨌든, 넌 내 적이 아니잖냐.” 


“아닙니다. 박사님과는 향후에도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 가고 싶어요.” 


“그래. 나도 웬만하면 아군이랑은 원만하게 지내고 싶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예. 박사님과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정말 많았는데…이제라도 화해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 박사를 보며, 글래디아도 마주 웃었다. 


오랜 갈등이 봉합된 자리에 내려앉은 훈훈함이 장난스레 마음을 녹인다. 


답이 없어 보이는 난제를 풀어냈을 때처럼, 진한 여운이 가슴 속에 맴돌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한 번 털어놔봐.” 


“예?” 


“들어 줄 테니까 이야기해보라고. 말하고 싶은 거 많다면서.”  


“시간 괜찮으십니까?” 


“엉. 어차피 주말이기도 하고, 일도 오전 중에 다 끝내놔서 한가해. 너 안 왔으면 오늘도 하루 종일 로렌티나랑 놀았을 텐데 뭐.” 



이제라도 솔직해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과거에 대한 집착과 선입견을 전부 내려놓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기를 잘했다고. 


정말 기뻤다. 


평소 잘 입에 대지 않는 술이라도 기울이면서 축하하고 싶을 정도로. 



“박사님, 대장! 피자 사 왔어요!” 


“오, 타이밍 좋고.” 


“...상어, 피자가 그렇게 좋습니까.” 



때마침 품에 피자 박스를 한가득 안은 로렌티나가 사무실 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네! 맛있잖아요. 근데 두 분…어째 되게 사이좋아지셨네요?” 



미심쩍은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는 로렌티나를 앞에 두고, 박사가 글래디아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됐다. 아무튼 뭐, 아직 낮이긴 하다만 맥주라도 한 캔 깔래? 화해 기념으로.” 


“좋습니다. 취하긴 힘들겠지만요.” 


“저도 마실래요!” 



그렇게 세 사람은 즉흥적으로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셋 모두 모처럼 한가했기에, 딱히 거리낄 건 없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피자를 우물거리며 육지의 언어로 바다를 이야기하고. 


박사의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캔을 부딪히며 테라의 말로 에기르를 논했다. 


때로는 서로를 대놓고 돌려까며 폭소하기도 했고. 


에기르와 육지의 유머 수준을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독-타, 또 땡땡이치고 계시죠! 쉬시면 안 돼요!” 


“쉬는 게 아닙니다, 아미야. 저희는 지금 로도스와 에기르 간의 군사 협력에 관해 심도 있는 토론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 글래디아 씨? 그랬구나…근데 이 맛있는 냄새는 뭐죠?” 


“...말린 시테러입니다. 좀 드시겠습니까?” 


“끼뺫!” 



중간에 당나귀가 공습을 오는 사소한 찐빠가 있었지만, 글래디아가 쫓아냈다. 


그렇게 술자리가 순탄하게 무르익고. 



“...후, 덥군요.”  



얼굴이 발그레해진 글래디아가 모자를 벗고 손부채질을 했다. 



“취했냐?” 


“분위기에 취한 겁니다, 박사님. 어비설 헌터즈는 알코올에 지지 않습니다.” 


“에헤, 대장 흐트러진 모습은 진짜 오랜만이네요.” 


“난 아예 처음 보는데. 그래도 신선해서 재밌네.”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키득거리며 다 먹은 피자 박스를 접는 박사. 


그리고 그의 입가를 닦아 주며 방긋 웃는 로렌티나. 


평소의 글래디아였다면 품위가 없다며 눈살을 찌푸렸을 장면인데, 왜일까. 


아닌 게 아니라, 꽤나 즐거웠다. 



“박사님, 생각보다 저랑 상성이 좋으시군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박사와 말이 잘 통해서일까. 


그가 풀어 놓는 육지 이야기가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웠던 것 때문일지도 모르고. 


자신이 에기르에 대해 말할 때마다 찰진 리액션을 돌려줘서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 


그저 얼굴이 뜨겁고. 


한없이 유쾌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상어, 당신 아까 박사님의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