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모음: https://arca.live/b/arknights/103156508?target=all&keyword=%EC%86%8C%EC%84%A4+%EB%AA%A8%EC%9D%8C&p=1



------



긴 회상을 끝낸 글래디아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결국 박사와 친해지고 싶은 거였잖습니까. 


박사의 능력과 인품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봐 왔기에, 내심 그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고. 


그가 에기르를 되찾는 여정에 함께할 만한 인재임을 눈치채고 있었던 거잖아요. 


그래서 그가 상어에게 섵불리 손을 댔다는 걸 들었을 때 더욱 화가 났던 거고요. 


적어도 육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박사라면, 그런 생각 없는 행동은 안 할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사과, 해야겠죠.” 



아직 데면데면한 사이인 박사에게, 자기 감정을 못 이겨 분노를 토한 것도. 


저주에 가까운 실언을 해 버린 것도, 전부 그녀의 실책이었다. 


그리고 그 실책은 육지의 기준으로 봐도 더없는 실례요, 에기르의 기준으로 보면 관계가 끊겨도 할 말 없는 결례였다. 


안 그래도 서먹한 박사와의 관계다. 


여기서 더 멀어진다면, 글래디아만 더 힘들어질 뿐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좋아요, 글래디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예복을 차려입고 가서,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박사님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거예요. 


비아냥은 싹 빼고 본심만 말해야 합니다. 


박사님이 가지고 있을 선입견은 둘째치고서라도, 그 진심만큼은 전해질 수 있게. 


마음을 정한 글래디아는, 옷장에서 고급스러운 옷 한 벌을 꺼냈다. 


육지 사람들과 교류할 때를 대비해 에기르 전통 양식으로 주문제작한 고급품이었다. 


몇 시간에 걸쳐 정성스레 몸을 씻은 뒤, 의복을 걸치고 화장을 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글래디아는 천천히 박사의 방으로 향했다. 


지나가던 오퍼레이터들이 그녀를 보고 뭐라고 수군거렸지만, 그녀의 알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가 박사의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방 안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상어야. 넌 잘못 없는데.” 

 

“뭐가요? 아, 서류업무 시킨 거 말씀이시죠? 그건 좀 위험했어요. 이제야 말씀드리는데, 박사님. 사실 전 세 시간 이상 서류를 보면 섹스를 하고 싶어지는 지병이 있답니다.” 


“아니…그것도 미안하긴 한데, 그래서 피자 사줬잖아.” 


“헤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문에 나 있는 작은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로렌티나와 박사의 모습이 보였다. 


얌전히 의자에 앉아 피자를 우물거리는 로렌티나.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서 머리를 빗어 주고 있는 박사. 


여느 때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나 때문에 괜히 귀찮은 일 겪게 한 것 같아서. 오늘 글래디아도 그렇고. 징계 받을 뻔 한 것도 그렇고.” 


“결국 정상참작돼서 징계 안 받았잖아요.” 


“그래도.” 


“박사님, 전에 말씀드렸죠? 저는 박사님을 지탱해드릴 수 있는 것만 해도 영광이라고. 박사님을 위해서라면 팔 한 두 개쯤 날아가도 신경 안 쓸 텐데, 그런 사소한 일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박사를 돌아보며 방긋 웃는 로렌티나. 


하지만 박사의 표정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고맙다, 상어야.” 


“어머. 다른 걱정거리가 있으신 표정인데요?” 


“응. 그냥. 사실 아까 글래디아랑 그런 얘기도 했거든. 너랑 내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미 친구로 지내기로 쇼부 봤잖아요.” 


“그렇긴 한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건 좀 이기적인 것 같아서. 다시 네 생각도 들어 보고 싶어.” 



진지함이 담긴 박사의 말에, 로렌티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되게 위험한 말씀을 하시네요, 박사님.” 


“응?” 


“제가 박사님을 독점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면 어쩌실 건데요?” 


“그건 안 되지.” 


“뭐예요, 그럼.”  


“......” 



더욱 처참하게 구겨지는 박사의 표정을 올려다보며 키득거린 그녀는, 이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내뻗어진 가녀린 손가락이, 그의 뺨을 쓰다듬고.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박사님. 하지만 괜찮아요.” 


“...상어야.” 


“전 이대로도 만족하니까요. 뭐니뭐니해도, 당신 곁에 있는 것만으로 정말 즐거운걸요.” 



박사가 침통하게 눈을 감는다. 



“이미 박사님은 저한테 충분히 많이 주셨어요. 미쳐 있던 저를 끌어안아 주시고, 제 친구가 되어 주셨죠. 하룻밤의 멋진 추억도 선사해 주셨고요. 지금 전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답니다.” 


“...미안해. 진짜 미안하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떤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저는 그 여운만 있으면 충분해요.” 


“네가 더 행복했으면 했어.” 


“그러니까 이미 행복하다구요, 바보 같은 박사님. 뭐, 박사님 닮은 아이를 하나 낳아 기를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요.” 



박사의 뺨을 장난스럽게 톡톡 두드리며 애틋하게 웃는 로렌티나. 


그리고 안타까울 정도로 슬퍼 보이는 박사.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글래디아는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건 일반적인 로맨스의 현장이 아니었다. 


하나의 애정이 애달프게 지고. 


그 빈자리에, 웬만한 사랑보다 훨씬 진하고 끈끈한 우정이 피어나는. 


가슴 아프고도 경이로운 청춘의 한 장면이었다. 



“아, 박사님과 사리아 씨의 아이도 좋아요. 제가 잘 돌봐 드릴 수 있어요.” 


“...아니, 그건 가정교육상 문제가 좀….” 


“에헤, 또 이러신다. 그런 농담할 거면 얼굴부터 좀 펴요. 목소리에도 힘 좀 넣으시구요. 네?” 


“아니, 그냥. 난 진지하게 책임지고 싶었거든. 너도, 사리아도.” 


“이런 문제는 박사님이 아니라 이 세상 누구라도 책임 못 져요. 에기르는 일부다처제라고 말씀드렸죠? 제가 예전에 여자 네 명이랑 결혼한 남자를 봤는데, 그 사람은 항상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거든요. 자기는 자기 부인들을 모두 평등하게 사랑한다고요. 그 남자가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어떻게 됐는데?”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답니다. 매일 집에서 치정 싸움 벌어지는 걸 감당 못 해서 외도하다가, 분노한 부인들한테 척살당했죠.” 


“아.”  

   

“그런 거예요, 박사님. 사람이란 참 어리석어서, 욕심을 품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모르거든요. 오히려 지금 여기서 확실히 끊어내는 게 모두를 위한 결말이랍니다.” 



로렌티나는 박사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감정을 꺾었고. 


박사는 모두를 위해 자신의 치기 어린 마음을 접고 그녀를 떠나보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그 사이를 이어 주는 것은 추억이었고. 


또한 배려였으며. 


단단하기 그지없는 신뢰였다. 


그래. 


글래디아가 박사와 맺기를 줄곧 원해 왔던, 바로 그 신뢰관계였다. 



“...그래도 언제든 생각 바뀌면 말해. 사리아랑 셋이서 이야기해 보자.” 


“네, 그때는 부탁드릴게요. 아, 박사님. 손이 멈추셨어요.” 


“빗을 데 다 빗었는데.” 


“으음, 한 번만 더 해주세요. 좀만 세게요.” 


“머릿결 상해.” 


“훗, 박사님. 에기르산 시베드 퍼퓸 트리트먼트의 효과를 너무 얕보시는군요!” 


“시발, 인정. 그거 효과 좋긴 좋더라.”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가 웃고 떠드는 두 사람. 


잠시 떠돌던 애틋한 무드는 어느새 싹 사라지고. 


해맑은 웃음소리와 격의 없는 농담만이 박사의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그렇다면, 지금이 들어갈 타이밍이겠지. 


방금 장면의 여운을 잠시 접고 헛기침을 한 글래디아는,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박사님, 글래디아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글래디아? 응. 들어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글래디아의 눈에 잡혔다. 



“안녕하세요, 글래디아 대장. 피자 드실래요? 맛있어요.”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박사님. 잠시…단 둘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 



고개를 갸웃하는 박사.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미안한데, 상어야. 클로저한테 가서 피자 두 판만 더 달라고 할래? 돈은 줄게.” 



하지만 로렌티나는 글래디아의 목적을 대충 눈치챈 듯 했다. 


박사가 그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자, 잔뜩 신이 난 그녀가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일어났다.



“아뇨! 제가 사 올게요!”


“...그럴래?” 


“네! 그럼 두 분 이야기 잘 하세요!”   



글래디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박사의 방을 빠져나가는 상어.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박사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갑자기 왜 저러나 몰라. 아무튼 일단 앉아. 차 마실래?” 


“감사합니다.” 



파란 찻주전자에서 맑은 차 한 잔을 따라 내민 박사는, 이내 깍지를 끼고 글래디아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그런 그에게, 글래디아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눌러쓴 모자가 삐뚜름해질만큼 깊게. 



“...먼저, 죄송합니다. 아까 제 분에 못 이겨 심한 말을 생각 없이 내뱉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박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