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 기념 문학



타임키퍼의 일이란 으레 그녀 자신밖에 할 수 없는 분야가 많아서, 소네트라는 걸출한 조수를 두고도 버틴은 철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깐깐하기 그지없는 재단의 기준에 트집잡히기 않으려면 그만큼 노력하는 수밖에 없으니. 밖으로 파견 나가지 않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버틴은 무겁게 느껴지는 모자도 잠시 내려놓고, 서류 더미를 붙잡고 끙끙대는 참이었다.


"하아."


심적으로 피로하다. 아무리 굳은 의지와, 아무리 성숙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몸뚱이는 겨우 열여섯 소녀의 것이었으니.


요 며칠간 쉬지 않고 일을 처리했더니 몸이 휴식을 호소했다. 서류에 유려한 글씨체를 써내려가던 버틴의 손가락이 문득 펜을 놓쳤다.


엉망이 된 서류를 보며 그녀는 짧게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중요한 안건이 아니라 망정이지.


"잠시 쉬어야겠네."


뻑뻑한 눈가를 꾹 누른다. 허나 그렇게 중얼대면서도, 쉬지 않고 서류를 훑다가.

마침내 한계에 이른 듯, 저도 모르는 사이 눈이 감기고 몸이 스르르 미끄러진다.


과거 제1 방어선 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익숙한 자세로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있던 버틴은, 입술을 툭툭 건드리는 금촉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멍한 정신 속에서, 버틴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입술에 닿은 것을 핥았다. 


"......써."


"일어났어, 마스터?"


언제 들어도 나긋나긋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 그러니 버틴은 그 자장가처럼 들리는 속삭임과 눈꺼풀에 짙게 매달린 수미를 떨쳐내고 간신히 눈을 떴다.


아무래도 일을 하다가 깜빡 존 모양이다. 그녀의 앞에 있는 소녀는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미소지으며, 반면 시선에는 걱정을 띄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덕목인걸, 마스터... 아무리 예리한 검도 손길이 닿지 않으면 결국 무뎌지기 마련인데."


"네 말이 맞아. 이것만 하고 좀 쉬어야겠다."


조금 전과 비슷한 말을 반복하며, 버틴은 반쯤 구겨진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적어도 그 모습에서 당장 몸을 뉘일 의욕은 보이지 않았으니.


슈나이더는 그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가, 이내 손가락을 번개처럼 움직였다.


"읍?"


저도 모르게 고양이처럼 하품을 하는 버틴의 입에 작고 시커먼 것이 쏘옥 들어갔다. 반사적으로 입에 그것을 머금은 버틴은 안에서 올라오는 쓴맛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순도 높은 다크 카카오의 쓴맛. 풍미가 있고, 미약한 단맛도 남아 있긴 하지만 솔직히 버틴이 그리 선호하는 취향은 아니었다. 그녀는 토피 사탕과 같은 순수한 단맛을 선호했는데.


어쩌면 소네트보다도 그녀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는데. 버틴이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슈나이더를 살짝 째려보자 그녀는 개구장이처럼 쿡쿡거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2월 13일.... 음?"


"마스터가 언덕 밑의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사이 하루가 지나갔는걸.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야."


그래서 난데없이 초콜릿인가.

슈나이더는 싱글싱글 웃으며 품 안에서 유리병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검고 어두운 초콜릿 조각들이 달그락 굴렀다.


"...고마워."


그녀의 취향에 썩 맞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상대의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기에 버틴은 불평 대신 감사를 표했다.


슈나이더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지자, 버틴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아쉽지? 내가 이런 초콜릿을 줘서 말이야... 마스터는 좀 더 달고, 끈적끈적한 것들을 좋아하잖아..."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사이에게 있어 괜한 겸양은 무의미했다. 버틴이 긍정도 부정도 않자, 소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쉬워하지 마. 마스터의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어......"


이미 휴식이나 업무 같은 건 뒷전이 된 지 오래. 슈나이더는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제가 선물힌 유리병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입술에 물었다.


쓰고, 짙다. 생각해 보면 이건 버틴보다는 슈나이더가 조금 더 좋아할 것 같은 맛이었다. 진득히도 녹여, 입천장과 혓바닥에까지 달라붙어 쓰디쓴 여운을 남기는 구속의 맛.


"마스터는 쓴 걸 먹기 힘드니, 내가 조금 도와줘야겠네..."


고작해야 초콜릿 조각 하나를 삼키는 동작이 아찔할 정도로 관능적이다. 버틴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홍옥빛 눈동자가 여행가방에 뜬 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어, 테이블 너머로 가볍게 끌어당기는 손길. 버틴은 구태여 뿌리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부닥칠 것처럼 숨결이 가까워지고, 이지적이고 냉정한 눈동자는 어쩔 수 없이 열기와 습기를 머금는다.


짙고도 끈적거리는 입맞춤. 어쩐지 시찰리아 오렌지 향이 아른거리는 듯한 타액이 씁쓰레한 초콜릿과 뒤섞이며 새콤한 산미를 남긴다. 초콜릿은 금세 녹아 없어졌음에도,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달라붙어 서로의 침을 마셨다.


"푸... 하..."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결속에도 끝은 찾아온다. 아쉽다는 듯 서로에게서 입술을 떼어내고, 붉어진 뺨과 눈물이 맺힌 눈가, 숨이 차 헐떡거리는 서로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어느새 얽은 깍지는 끝내 놓지 않은 채로.


"어때, 마스터... 마음에 들어?"


괜히 그녀의 취향에 정반대인 초콜릿을 가지고 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버틴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입 안에 남은 잔향을 음미했다.


다크 카카오의 맛과 시찰리아 오렌지의 향. 열대와 냉대. 초콜릿은 이미 다 녹아내렸지만, 그녀의 향기는 입천장 안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미각을 마비시키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 슈나이더가 처음으로 찾아왔을 뿐, 곧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그녀에게 초콜릿을 선물하겠지만...

미안하게도, 입 안에 남은 향취가 너무 짙어 다른 초콜릿의 달콤함은 무뎌질 정도로.


버틴은 슈나이더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이번에는 제 쪽에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하나 더 먹어보면... 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