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안은 티타임을 즐기기에 썩 나쁘지 않은 곳이다.

 

다채로운 날씨를 볼 수 있고뒷정리도 간편하며언제나 티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다무엇보다 이 곳에는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는 수많은 동료들이 있었다.

 

물론 그 동료들’ 모두가 버틴이 즐기는 한적한 티타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드루비스처럼 우아하게 티타임에 어울려 주는 마도학자도 있지만레굴루스는 티타임의 ‘T’만 들려도 닥터 페퍼 저장고로 도망치고 소더비는 버틴도 당혹스러워할 만한 것들을 차랍시고 가져온다.

 

버틴은 이외에도 수많은 동료들과 티타임을 즐기지만······. 암묵적으로 그녀가 티타임에 초대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딱히 그네들을 싫어하거나 차별하는 건 아니니까.

 

단지 마도학자들은 하나의 분류로 엮을 수 없을 만큼 개성적이고······그 중 일부는 차를 마시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버틴은 그들을 티타임에 잘 초대하지 않는다.

다른 티타임 파트너가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말이다.

 

하하그래서 절 찾으신 거였습니까주군.”

 

미안혹시 잠시 어울려 줄 수 있을까?”

 

사과를 듣고자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기사가 어찌 주군의 부름을 거절하겠습니까?”

 

오늘티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은 것은······. 앉은 게 맞다면 가슴 갑옷과 망토밖에 남지 않은그럼에도 한 눈에 훌륭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모범적인 기사였다.

 

두 사람의 앞에 각각 찻잔이 놓였다아직 뜨겁게 팔팔 끓어오르는 찻물의 색은 오늘 여행가방의 하늘처럼 맑고 청아한 쪽빛이었다.

 

차향이 좋군요.”

 

냄새도 맡을 수 있어?”

 

하하필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비록 이런 몸이긴 하나생전의 감각은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어느 때처럼 스스로의 처량한 처지를 농담 삼아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던 롤랑은맞은편에 앉은 상대의 기대 어린 눈초리를 보고 움찔했다.

 

“······아뇨아무리 그래도 차를 마실 수는 없습니다갑옷에 손상이 생기니까요.”

 

아쉽네.”

 

하하저도 아쉽지만 어쩌겠습니까그래도 오랜만에 이 향기를 만끽하는 것만으로도······필부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어떤 의미로는 타임키퍼와의 독대지만 무거운 이야기는 오가지 않는다결국 이 작은 모임의 본질은 티타임친목을 도모하며바쁜 업무로부터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귀한 시간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나오는 이야기의 주제도 평소와는 달리 시시콜콜하기 짝이 없었다타임키퍼와 그 일행들의 여정은 여행가방 전체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화제였으므로자연히 이야기의 중심은 나이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영웅 롤랑의 서사시를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그의 이야기는 또한 중세 문학 애호가라도 전부 다 알지 못할 정도로 깊고 방대했으니까

 

게다가 음유시인의 입을 통해 전해져 온 구전과당사자로부터 직접 듣는 생생한 이야기에는 분명 생동감의 차이가 있었다

 

또한그는 칼만큼이나 혀를 잘 다루기도 했으니차의 맛에 대해 함께 토론할 수 없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그만큼 훌륭한 말벗도 곁에 없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하하드래곤이 아주 레고 모음처럼 부서져 버렸죠!”

 

“······그렇구나하하.”

 

다만 가끔 튀어나오는 저 곤란한 농담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렇게 억지로 웃으실 필요 없습니다주군주군께서는 제 휘하의 기사 녀석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경 휘하의 기사들은 무조건 웃어야 한다는······.”

 

하하사소한 건 신경쓸 필요 없으십니다제 유머 감각이 조금 특별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이 유쾌한 기사가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버틴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말을 찻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녀의 무감정한 은빛 눈동자에서 어떤 감정의 편린을 읽은 것인지기사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덜컹하고 갑옷들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하하속시원하게 말하셔도 괜찮습니다기사는 주군을 지키기 위해 임하는 것인데주군이 기사의 눈치를 봐서야 되겠습니까?”

 

“······난 그 정도로 절대적인 충성의 개념은 아직 낯설어서재단에서는 결국 윗사람과 아랫사람 관계더라도 최소한의 존중은 필요하다고 가르치거든.”

 

그것도 이해합니다아무래도 저희가 살아온 시대가 다르니까요이렇게 다른 시간을 걷는 이들이 모이고 인연을 맺은 것 또한신의 보우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버틴은 이번에도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아무래도 그녀는 폭풍우를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으니까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나이트도 말실수를 눈치챘는지분위기가 더 나빠지기 전에 그는 익살맞은 태도로 화제를 돌렸다확실히 그는 이런 면에 있어서는 능란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그래도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주군주군께서 충성으로 제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우정으로 제 곁에서 함께 걷고 싶다면······.”

 

걷고 싶다면?”

 

그럴 수는 없죠하하기사는 언제나 한 발 앞서 나아가 위험으로부터 주군을 지켜야 하니까요그건 물론 아름다운 레이디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이런 아첨은 뻔하지만 나쁘지 않았다버틴이 가볍게 미소하자분위기는 이 작은 티 테이블에 흐르는 차향처럼 은은해졌다.

 

그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솔직하게 말하셔도 된다는 의미입니다당신은 저의 주군이시지만당신은 저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친구······. 맞는 말이네.”

 

물론 둘 사이에는 종족과 나이경험과 성별 등 수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러한 다름은 오히려 서로를 배척하는 대신 서로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상당히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허락도 받았겠다버틴은 제 속내에 든 것을 직구로 내어놓았다.

 

네 그 농담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네가 그런 농담을 고수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말이야.”

 

확실히 시대가 다르니 감성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군요디케 씨는 좋아하던데 말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디케 씨가 특이한 게 아닐까버틴은 이번에도 말을 삼켰다.

 

뭐라고 하는 건 아니야다만네 성격을 아니까.”

 

나이트는 단단한 갑옷과 피 묻은 검으로 이루어진 존재모르는 이가 본다면 얼핏 괴물과도 같아 두려워할 수도 있는 형상이지만그와 가까운 이들은 그 강철의 껍데기 속에서 온화하고 다정하면서도 열정이 넘치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나 그의 배려심은 왜 유머의 영역에서만 고장나는 것일까충직한 기사는 잠시 고민하다가이내 무거워진 어조로 말했다.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만이건 제 농담보다도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텐데요.”

 

평소의 유쾌함과 온화함도 가면은 아니었지만결국 그의 본분은 기사였다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결국 검을 휘둘러 수많은 죽음을 행한 전사.

 

그의 명예와 영광기사도와 무훈시는 수많은 이름 없는 시체들의 위에 쌓아올려진 것이었다그리고 롤랑은 단 한 번도 제가 걸어온 길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듣고 싶어.”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하지만 기사로써의 그는 몰라도한 인간으로서의 그는 그저······자신의 어둡고 피비린내나는 일면을친밀하고 애정하는 상대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버틴은 그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중세 문학은 결국 낡고 케케묵은 고전이 되었지사람들은 네 이야기를 추종하지만 이야기 속의 롤랑과 네가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결국 이야기는 후대로 전승되며 왜곡되고영웅담으로 승화되며 보다 완전하고 위대한 인물로 재해석될 수밖에 없으니까.

허나 세상에 그림자 없는 빛이 있던가?

 

난 너를 알고 싶어.”

 

주군······. 아니버틴 씨.”

 

위대한 기사 롤랑이 아니라아무도 몰라주더라도 여전히 기사도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이름 없는 기사, A 나이트를 말이야.”

 

소녀의 눈동자는 어느 때와 같이 단호하면서도 확고하고꾸밈없으면서 찬란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마술이나 최음이 아닌 마음으로수많은 이들을 홀렸던 바로 그 눈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말해드리겠습니다.”

 

결국 못 이기겠다는 나이트는 어깨를 늘어트렸다가이내 검을 뽑아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뒤랭달그 전설적인 명검은 세월의 무게 속에서도 여전히 견고함과 예리함을 자랑했으나본래 날에 새겨졌던 영광을 노래하는 시는 핏자국에 뒤덮여 군데군데 지워져 있었다.

 

마치 제 주인과도 같은 검이었다그녀가 더 잘 볼 수 있도록그리고 혹여라도 베이는 일이 없도록 검의 날을 비스듬히 눕히고서 이름 없는 기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비의 일격(Coup de Grâce)이라는 관용구를 아십니까?”

 

알고 있어.”

 

돌이킬 수 없는 부상으로 고통받는 상대에게 안식을 선사하는 죽음.

 

필부의 마도술이 그 쪽으로 발달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결국 필부의 본분은 기사였고이 강철로 된 손으로는 누군가를 살릴 수 없었으니까요.”

 

누군가는 쇠약해진 자의 숨통을 끊는 데 특화되어 있는 그의 능력을 졸렬하다 비난했으나, A 나이트는 스스로의 힘과 검에 대해 한 번도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의 통찰은 연민이니모순되게도 검을 들어올리는 마음의 원동력은 적마저 포용하는 이해심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안식을 거부하기도 합니다제 동료들과 부하들 중에 특히 그리 고집불통이 많았죠마도술로도 치유할 수 없는 부상을 입었으면서도끝까지 운명에 발버둥치겠다고 악을 쓰는 미련한 놈들 말입니다.”

 

결국 기사는 싸우는 자고기사단은 전쟁을 위한 집단이다.

이제는 몸마저 잃고서품 때 받은 너덜너덜한 리본과 말라붙은 피가 떨어지지 않은 검밖에 남지 않은 기사는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았을 것인가.

 

그가 떠나보낸 이들만큼이나그를 떠난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저도 기초적인 응급처치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만······. 정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이들은 어쩔 수 없었죠인간의 의학도마도학자의 마도술도 통하지 않는.”

 

그랬구나.”

 

그럼에도 마지막 자비조차 거부한 이들에게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들의 숨이 꺼지기 전까지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위대한 영웅도명예로운 기사도 아니었다몸은 소실되었고 갑옷 조각 일부로 제 동작을 표현하는 게 전부지만.

그 순간의 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 명의 사람이었다.

 

애송이 시절에는 울기도 많이 울었고조금 더 성숙해진 다음에는 신께 기도드렸습니다기적이 찾아와 달라고하지만 어느 날죽어 가던 제 동기가 말하더군요.”

 

나는 곧 그 분을 만나러 가지만너는 그 분의 곁에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니지금은 하늘이 아니라 땅을 보아 달라고 말입니다.”

 

그 분께서 어린 양을 품에 안으실 텐데 죽음이 무에 두렵겠습니까가장 두려운 것은언제나 삶이었지요······.”

 

탄식이 덧없이 흩어진다분위기가 너무 침잠한 것을 느꼈는지 나이트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로 농담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적어도 마지막에는웃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효과는 있었어?”

 

하하유감스럽게도 그렇진 않았습니다아무래도 제 특별한’ 농담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거든요.”

 

하지만하고 기사는 말을 끝맺었다.

 

하지만 제 농담이 재미없어도제가 웃으니 그들도 결국에는 따라 웃더군요.”

 

이야기는 끝이 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여전히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는 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아득한 전장도자욱한 피비린내도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헐떡임도 그 자리에는 없었다.

 

나이트롤랑이름 없는 기사유쾌하지만 다정한 그는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웃는 표정일 것이다.

 

언젠가는 필부가 농담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겁니다.”

 

더 이상 누군가를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억지웃음을 끌어올릴 필요도 없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는 날이 말입니다.”

 

분명 그럴 거야.”

 

그래서 버틴도 함께 웃기로 했다그가 원하는 대로.

 

나도 농담을 연습해 둬야겠는걸.”

 

어째서입니까?”

 

그리고자신이 원하는 대로.

 

 때는 내가 널 웃게 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