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서울 2063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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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옆 침대에 잠든 알리사를 두고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앵커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뉴스를 진행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얼마 전 역대 최대 규모의 아동 포르노 제작으로 구속된 야마구치구미 간부 이케다 하루스케가 오늘 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구치소 관계자는 하루스케가 구치소에 들어왔을 때부터 정신적 문제를 호소했으며 자살에 사용된 도구는 외부에서 밀반입하였다고 밝혔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 김도영 감독이 오늘 전격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김도영 감독은 팀의 역대 20번째 우승이 자신의 마지막 목표였다며 은퇴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자세한 내용, 박형준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그때, 조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원은 TV를 끄고 연락을 받았다.


“미세스 리, 다 끝났어. 이제 두 사람에게도 엘리베이터가 최상층까지 이끌어줄 거야. 스위트룸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홀에 있는 엘리베이터 6대 중에 파랗게 칠해진 녀석이야. 회장은 지금 만찬장에 있으니 대략 20분 정도 비어 있을 거야. 지금 움직여! 알리사 깨우고.”


지원은 총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알리사를 흔들었다.


“알리사, 일어나! 이제 가야 할 때야!”


알리사는 반쯤 감은 눈을 비비더니 하품을 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와 대충 벗어둔 정장 외투를 입었다. 지원은 가방에서 권총과 예비 탄창을 꺼내 탄창은 허리춤에 끼우고, 권총은 정장 주머니에 넣었다.


“가자.”


둘은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슬쩍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원은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물었다.


“이거 CCTV는 어쩌지?”


레나가 말했다.


“이미 다 정리했어요. 110층 누르고 가죠.”


지원이 110층을 누르자마자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상승했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조 씨와 레나도 침묵을 지켰다. 순식간에 엘리베이터는 110층에서 멈추고, 문이 열리자 그 앞으로 어두운 바닥과 회색 벽으로 이루어진 중후한 궁전이 나타났다. 둘은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지원이 내리기 전 누른 그대로 엘리베이터는 다시 내려갔다.


“정말 궁전이나 마찬가지네.”


“황제의 별궁…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곳이예요.”


짧은 복도를 지나자 벽 하나를 차지한 홀로그램 TV와 유리 테이블을 중간에 둔 가죽 소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리사는 테이블 위 크리스탈 그릇에 담긴 사과를 집었다.


“진짜 사과예요. 유전자 조작 같은 게 아니라 전쟁 전에 재배되던 후지 품종이요. 우리들은 구경도 못하는 물건이잖아요. 같이 담긴 바나나도 그렇고.”


조 씨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사치야. 정말 대기업 회장은 되야 누리는 사치라고. 방 안의 모든 게 직장인 1년 봉급으로도 못 사는 것들뿐이야.”


지원은 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보다 내가 거슬리는건… 비틀즈의 노래가 어디서 들리냐는 거지. 아무리 찾아도 소리가 나는 기계는 없는데.”


조 씨가 다시 말했다.


“미세스 리, 거기 있잖아. 침대 옆에.”


지원은 자단나무로 만든 침대 옆 선반 위에서 무언가 돌아가는 전자기기를 발견했다. 회전하는 검은 원반을 바늘이 끝없이 긁고 있는 기기에서 한 세기 전의 전설적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여기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소리가 나는 거지? 데이터 카드를 넣는 곳은 없어보이는데.”


“턴테이블이네. 거기 돌아가는 원판이 소리를 담고 있는 거야. 내가 어릴 때도 반쯤 사라진 물건이었는데 회장 취향이 엄청 올드한가 보네. 거기 바늘을 들면 돼.”


지원이 바늘을 들자 소리가 멈췄다. 혹시나 싶어 턴테이블 밑 선반을 열자, 금색 장식이 새겨진 고급 목재 손잡이가 달린 리볼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원은 마음에 든다는 듯 리볼버를 살피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오~ 콜트 파이슨. 6발 다 장전되어 있네. 이건 내가 가져야지.”


지원은 콜트 파이슨의 탄창에서 총알 하나를 뺀 다음 주머니에 넣었다. 알리사가 소리쳤다.


“언니, 이리로 와봐요.”


알리사가 부르는 곳은 거실 뒤편 대형 냉장고가 있는 식당과 연결된 곳이었다. 커다란 사육장 안에 도마뱀 한 마리가 멍하니 엎드려 있었다. 지원의 두 눈이 반짝였다.


“도마뱀… ‘돌기꼬리왕도마뱀’이라는 종이야. 멸종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길러지고 있을 줄이야.”


“멸종했다고 알려진 다른 애들도 이렇게 부자들의 집에서 길러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보다 준비해. 회장이 엘리베이터로 가고 있어.”


지원이 손짓하자, 알리사는 홀로그램 TV가 있는 벽 뒤에 숨었다. 지원 역시 자신의 총을 뽑아들고 엘리베이터가 보이는 곳인 침실로 통하는 문 뒤에 몸을 숨겼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28층에 멈추더니 곧바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레나가 말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명이 있어요. 일단 경호원이나 아담은 아니예요.”


한층 한층 엘리베이터가 올라올 때마다 지원은 호흡을 가다듬고 권총을 고쳐 잡았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척 봐도 값비싼 정장을 입은 흑발의 청년이 가슴골이 다 파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옆에 끼고 나타났다.


“만찬에서 부른 노래, 정말 멋졌어. 갓 스물이라고 했지? 오늘 밤 침대에서…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준다면 삼성이 네 스폰서가 되어 주지. 어때?”


알리사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자는 정말이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인가요? 그럼 정말 좋죠!”


“음~ 그럼 이리…”


그때, 준형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미안하지만 잠시 내려가 있어 줄래? 97층에 내려가서 직원한테 이걸 보여주면 머물 방을 줄 거야. 좀 있다가 다시 부를게.”


여자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자, 준형은 홀로그램 TV 앞에 우뚝 서서 말했다.


“그러면… 여기까지 쳐들어온 대담한 족속들은 얼굴을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지원과 알리사 모두 당황했다. 조 씨가 말했다.


“둘 다 진정해! 그냥 해본 말일 거야.”


“TV 뒤에 하나, 침실에 하나. 어떻게 보안을 뚫고 여기까지 왔지?”


조 씨마저 경악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어쩔 수 없지, 통신 준비해. 대화를 해 보자고!”


지원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눈동자와 갈색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준용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준형의 얼굴이 순간 경악으로 일그러지다 이내 평정을 되찾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려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 동생아. 살아 있었구나! 난 네가 이제까지 무슨 일이라도 당한 게 아닐까 걱정했단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건강한 모양이네.”


“가식은 됐습니다. 형님, 어떻게 아버지를…!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걸 고려그룹에게 뒤집어 씌울 수 있죠!!”


준형의 표정이 싹 변했다. 가식적인 미소도 없이 싸늘한, 마치 독재자의 그것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이건 ‘사투(死鬪)’다. 정점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투. 아버지의 방식은 너무 느렸지. 그런 식으로는 급성장하는 고려그룹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한 행동은 모두 대국적인 결단이다. 이 나라를 삼키려는 고려그룹 그 빨갱이 새끼들을 짓밟고 정점에 온전히 홀로 서는 것이야 말로! 삼성이 살아남는 길이란 말이다!”


지원이 말했다.


“그게 아버지를 쏴 죽이고 식장에 모인 주요 기업 임원들을 통째로 날려버릴 이유가 된다는 거야? 아주 돌아버렸구만! 네가 죽인 노친내를 핑계로 망할 전쟁을 일으켜서 고려그룹을 짓밟고 정점에 서 봤자 그 모든 이득은 너한테나 들어오겠지. 우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남는 건 죽은 사람과 PTSD 환자와 빚일 테니까.”


준형은 대놓고 그녀를 비웃었다.


“알게 뭐야.”


“뭐야?!”


“왜? 너희들이 선택했잖아. 우리가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잖아. 우리가 힘들 때 도와줘야 한다고 했잖아. 너희가 우릴 선택한거야. 선택의 책임은 너희가 져야지, 왜 우리한테 따지는데? 우리가 이런 새끼인 줄 너희도 알았을 거 아냐, 그럼 막았어야지? 그땐 할 수 있었잖아.”


그 순간,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준형의 미간에 총알구멍이 뚫렸다. 준형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지지도 않은 채,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지원은 연기가 폴폴 나는 권총을 들고 다가가 쓰러진 준형에게 다시 총을 쐈다.


“적어도 나는 선택 안 했거든. 꼬마, 미안하지만 좆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


조 씨가 말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이런 씨발, 지금 누굴 죽인지 알기나 해?!”


“홀로그램이지. 이 정도 예상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주방 쪽에서 목소리와 함께 준형이 다시 나타났다. 경악한 지원이 쓰러진 준형을 바라봤을 땐, 그것은 노이즈와 함께 꺼져버렸다.


“홀로그램이라고?”


준형은 그런 지원을 무시하고 소파에 앉아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용병 따위가 고작 이 정도 대화에 총을 들이밀거라고는 쉽게 예상할 수 있지. 뭐, 그쪽은 용병 이전에 격식이 좀 있는… 과거가 있지만. 안 그런가, 이 경감?”


지원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알리사가 속삭였다.


“적어도 아까 같은 홀로그램은 아닌 것 같아요.”


다시 준용이 말했다.


“형님, 지금이라도 전쟁을 멈춰요. 아무리 봐도 우리에게 남는 것 하나 없는 행동이라고요!”


“역시 넌 너무 어려. 정세를 보지 못하는구나. 정점에 서는 것은 오로지 하나여야 한다. 둘이 정점에 서게 되면 공멸하게 되지. 내가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일이고, 곧 삼성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고려그룹이 끝이 아니다. 다음은 일본, 그리고 그린존 너머 만주가 될 것이고… 곧 아시아가 된다.”


지원은 준형의 허무맹랑한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미쳤군. 그래도 기업 CEO쯤 되면 사람 새끼는 아니어도 인간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인간 언저리도 안 되는 미치광이 몽상가였어.”


“주인한테 못하는 말이 없군. 내가 있기에 너희가 누리는 그 모든 것이 있거늘. 듣고 있나, 동생. 이제까지 널 찾을 필요가 없기에 그럴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내 앞길을 막는다면 널 샅샅이 찾아낼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형님!”


“목숨이 아깝다면 가만히 앉아 내가 고려그룹을 짓밟는 것이나 봐라. 그리고 용병, 너도 이 이상 관여하지 마라. 참전용사 아버지와, 의식불명인 남편이 있더군?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도록. 그리고 거기 보라머리…”


준형의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이내 일그러졌다.


“넌 뭐냐? 왜 아무런 기록도 없지? 아무튼, 너희 둘에게는 시간을 주지. 여기서 무사히 도망칠 시간 말이다.”


조 씨가 말했다.


“지금 당장 빠져나와. 아무래도 느낌이 정말 안 좋아. 당장!”


지원은 곧바로 알리사를 먼저 엘리베이터로 보낸 뒤, 끝까지 준형을 경계하며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준형은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것을 보더니 와인을 한 잔 마시며 중얼거렸다.


“아담, 아직 거기 있나? 원하는 데로 날뛰게 해주마. 그리고 빅스, 97층에 그 애 이리로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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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준형(26세)이 지원(33세)보다 연하다.